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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맨의 숨겨진 연인이라고 오해받는 밥이 보고싶다 3앱에서 작성
ㅇㅇ
23-12-01 16:39
2편
밥은 요즘 우울했다. 그냥 기분이 처지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많이 우울했다. 그는 심각하게 군 내 상담사를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 얘기를 했더니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스크리밍 이글스에서 그의 프론트 시터인 톰이 다정하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당연한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큰데. 네가 우울하고 비관하는 건 너무 당연한 거지. 정말 힘들면 상담사 찾아가서 얘기를 해 보는 것도 좋아. 아님 나라도 좋으면 나한테 얘기해도 돼. 요즘 뭐가 가장 힘들어?"
지금 이런 행동들.... 밥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 어디를 가나 그를 아는 사람, 혹은 모르는 사람들마저 그를 안타까운 동정의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다. 멀찌감치 서서 자기들끼리 수근거리거나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머뭇거리며 다가와서 위로의 말을 건네고 가거나.
심지어 기지 내 카페에선 그가 커피를 사고 돈을 내도 받지 않기도 했다. 아프간에서 작전 중 사망한 해군 소령의 배우자였던 카페 주인이 밥을 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주문하려고 서 있던 밥에게 갑자기 뜨끈한 라떼를 건네주며 말했다.
"시간이 약입니다. 시간이 약이에요. 조금만 더 버텨요."
"저는... "
말하려다 말고 밥은 받아든 라떼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카페에 들어와서 주문하려고 줄에 서 있었는데, 주문도 안 받고 라떼를 먼저 내 준 것이다.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주인이 웃었다.
"에스프레소 샷 2개에 저지방 우유, 뜨거운 거품 많이, 바닐라 시럽 하나. 뜨거운 라떼 맞죠?"
"네, 맞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 주문도 안했는데."
"매번 이렇게 주문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손님들 취향을 다 외우시는 거예요?"
"다는 아니고, 특별한 몇명만요."
주인이 윙크를 했다. 밥은 당황한다. 지금 저 사람이 나한테 플러팅하는 건가? 물론 중년의 호남으로부터 플러팅받는 게 그리 기분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너무 갑자기라... 혼란스러워 하는 밥의 표정을 보았는지 주인이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 이 기지에 플로이드 대위를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게다가 대위님 커피 취향은 행맨 덕에 외울 수 밖에 없었어요."
"행맨요?"
"주문할 때마다 베이비는 한 여름에도 뜨거운 라떼만 마신다면서 궁시렁거렸죠."
행맨이랑 같이 커피를 마시러 온 적이 별로 없는데 언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려다가, 뒤에 있는 사람들이 불평하는 것 같자 재빨리 픽업대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주인은 그가 내미는 돈을 받지 않으려 했으므로 밥은 그냥 팁 항아리에 돈을 넣었다. 그제서야 얼마전에 행맨과 크게 싸운 후 행맨이 한달 동안 그에게 커피를 사다준 걸 기억해 냈다. 사과하려고 사온 게 아니었다, 행맨의 말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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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하려고 사온 게 아니야. 그냥 잠깐 휴전을 하자는 거지. 너랑 계속 냉전 중이면 우리 부대랑 너희 부대 애들 다 눈치 보느라 힘들어지니까."
"그러게 누가 내 교육 순서에 새치기 하래! 나도 다음달까지 교육을 수료해야 올해 교육점수를 다 채우는데 너때문에-"
얼굴이 벌개져서 화를 내는 밥에게 그러자 커피를 들이밀었던 것이다. 행맨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미안한데 어쩔 수 없었어, 베이비. 난 다음달에 훈련이랑 출장 일정이 꽉 차 있어서 이번달에 다 해치워야 한단 말이야."
"자기 교육계획도 제대로 못 세우고 못 지키는 놈은 부대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어."
밥은 궁시렁거리면서도 커피를 받아들었다. 주는 건 받아야지 내버리면 안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밥은 종이컵 뚜껑을 열어 거품부터 후루룹 빨아들였다. 이제 막 받아왔는지 라떼는 딱 그의 입맛에 맞게 따뜻했고 그가 좋아하는 당도와 알맞은 양의 우유거품으로 덮여 있었다. 밥이 윗입술을 덮은 우유거품을 핥으며 뚱하게 말했다.
"좋아. 대신 뭘 해 줄 건데?"
"여러가지를..."
행맨이 밥이 윗입술을 핥는 것을 쳐다보며 그답지 않게 멍하게 대답했다. 그러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는 다시 그 유들유들한 자아로 돌아가서 말했다.
"라떼 한달간 사다 바치기?"
"부족한데."
"버거도 사줄까?"
"한달 동안."
"좋아. 그걸로 용서하는 거다."
"용서가 아니라 휴전이야."
"뭐가 됐든, 베이비."
그리고 행맨은 정말 한달 동안 매일 아침마다 밥에게 카페라떼를 사다 바쳤다. 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비몽사몽간에 일어나면 밖에 행맨이 커피를 들고 와 있었고, 밥은 라떼만 받아들고 행맨의 얼굴 앞에서 문을 쾅 닫곤 했다. 라떼는 늘 밥이 원하는 대로 조제되어 있었다. 그때도 밥은 행맨이 자신의 입맛을 어떻게 알고 딱 맞춰 사오는지 궁금해 했었다. 누가 알려준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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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는 어쨌더라... 밥이 기억을 떠올리려는 순간에 주인이 말을 이었기 때문에 연결이 뚝 끊겼다.
"어쨌든 대위님, 슬픔이 참기 힘들어지거나 누구 얘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마땅치 않으면 이리로 와요. 나랑 얘기하면 되죠.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 할 말이 많을 겁니다."
밥은 주인이 정말로 순수한 동정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플러팅이 아니었군. 아쉽네. 밥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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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도 결혼도 한 적이 없고 심지어 사귄 적도 없는데 밥은 행맨의 과부가 되어 있었다. 과부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긴 하지만, 하여간 모두가 그를 배우자를 사별한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제 더이상 아니라고 발버둥치는 것도 의미가 없어서 밥은 해명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다닐 뿐이다.
비질란테는 밥을 명예 비질란테로 임명한 게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시시때때로 밥을 부대 행사나 저녁 모임에 초대했다. 그들과 별로 친하지도 않고, 내내 적으로 싸워왔던 상대에게 딱히 좋은 감정도 없어서 몇번이나 거부하다가 급기야는 중령까지 나서서 꼭 한번 오라고 했으므로 밥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모인다는 바를 향해 나서야 했다.
비질란테 놈들은 여느 때처럼 바를 아예 전세라도 낸 것처럼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흥이 잔뜩 올라 있었다. 밥이 조심스럽게 바로 들어서자 누군가 보고 "밥!"이라고 소리질렀다. 곧 비질란테 모두가 손을 흔들며 "밥! 밥! 밥!"을 연호했다. 그 소리에 밥은 1년도 전의 노스 아일랜드 바닷가에서 풋볼게임을 하던 걸 떠올렸다.
햇빛은 눈부셨고 바닷바람은 시원했으며 모두가 그간의 긴장을 잊고 즐거웠지. 루스터가 던져준 공을 받아 밥이 엉겁결에 득점을 했고, 행맨이 그를 들어올렸고 다음엔 루스터가 그를 어깨에 앉혔다. 그 눈부시던 날의 추억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파와서 밥은 잠깐 눈을 감아야 했다. 그 장면에 있던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만이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죽어버렸다.
날 이런 고생길에 밀어넣고.
밥은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 비질란테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손에 소다만 한잔 들고 흔들리고 있다. 비질란테 놈들은 밥이 정말로 자기 동료인 것처럼 계속해서 게임에 끌어들이고 술을 권하고 장난을 걸었다. 밥이 에너지를 모두 끌어모아 상대했지만 이미 바닥이 난 지 오래다. 집에 가고 싶어. 지치고 울적하져서 밥은 계속 문쪽만 애타게 바라보았다.
"우리 베이비! 제수씨!"
비질란테 하나가 밥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 있던 놈들이 다 함께 와아! 하고 환성을 질렀다. 밥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눈을 내려떴다. 또 시작이구나.
"밥! 베이비! 제수씨! 알죠? 행맨이 제일 좋아하던 맥주가 뭔지!"
"모델로."
밥이 자동적으로 대답했다. 옆에 있던 놈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베이비가! 행맨놈은 모델로 맥주를 좋아했지. 자, 여러분. 그 맥주로 다들 한잔씩 따라 봅시다!"
모를 수가 없다. 바에서 행맨과 부딪쳐 말다툼이 벌어질 때마다 놈이 들고 있던 맥주였으니까. 바보라도 기억할 수 밖에 없을 거다. 밥이 뚱하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어깨에 팔을 걸친 녀석이 맥주잔을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우리의 영원한 동료이자 가장 우수했던 파일럿이자 사랑했던 형제인 행맨과,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연인 베이비를 위해! 자, 다 함께 건배합시다!"
"건배!"
또 맥주잔들이 쨍 하고 부딪쳤다. 밥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만 해도 똑같은 소리를 세번째 듣고 있어서 이 레퍼토리는 이제 외울 정도다. 선창한 녀석이 밥의 어깨를 꼭 안고 울먹이며 말했다.
"밥, 너무 슬퍼하지 마.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우리가 있잖아! 언제라도 상관 없으니까 우리가 필요하면 불러! 아무나 불러! 우린 부르면 바로 나간다, 엉? 네가 부르면 언제든지 튀어 나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불러! 그게 행맨을 향한 우리의 애정이고 우정이다! 밥 플로이드는 행맨이 사랑한 사람이니까 너도 우리 가족인 거다!"
"가족이다!"
모두 제창한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서 밥은 빨개진 뺨을 숙이며 대답했다.
"고마워..."
"자, 밥을 위해 다시 한번 건배!"
"건배!"
바의 다른 사람들이 다 돌아볼 정도로 비질란테는 요란하게 외치며 밥을 가운데 두고 빙빙 돌았다. 그래, 이글스에도 이렇게 시끄러운 놈들이 있긴 하지만 비질란테처럼 조직적으로 사람을 창피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내가 이래서 비질란테들을 싫어했어. 행맨이 없었어도 싫어했을 거야.
그러나 밥은 이런 왁자지껄한 놈들이 아주 밉지만은 않았다. 그는 요즘 계속 우울했으므로 누군가 그를(이유는 이상하더라도) 챙겨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게 살짝 감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피곤한 인간들을 조금 더 버티기로 한다.
다음 주, 정비에는 영 약한 비질란테놈들이 정비창 놈들의 억지를 못 이기고 쪼그라드는 것을 밥이 냉큼 달려가 도왔다. 믿거나 말거나, 르무어 기지에는 그런 말이 있다고 한다. 전투기 기체공학에 대해서는 밥 플로이드와 논쟁하지 말라고. 맥도널 더글라스와 록히드 마틴의 전투기 설계자가 오지 않는 한 밥을 이길 수 없다고. 어쨌든 밥이 편을 들어 준 비질란테는 덕택에 뒤로 밀리던 자신들의 전투기 수리일자를 앞으로 당길 수 있었다. 비질란테들이 베이비와 제수씨와 밥을 연호하는 동안 밥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신의 부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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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이 그 유명한 '축복받은 전립선'이야? 얌전하게 생겼네! 그렇게 요부 타입으로는 안 보이는데..."
밥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그렇게 수근대는 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이번엔 그 뿐만이 아니라 식당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들을 정도로 목소리가 컸을 뿐이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못 들은 척 하며 계속 식사를 했고, 뒤쪽에서 "아얏, 왜 꼬집어!" 라는 비명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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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밥은 다른 부대인 행맨을 참 자주도 마주쳤었다. 식당에서, 카페에서, 혹은 바에서. 하루에 세번씩 마주치기도 해서 날 미행하는 거냐고 밥이 짜증을 낸 적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기지의 어디를 둘러보아도 행맨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 기분나쁜 여유만만한 웃음, 자신감 넘치는 포즈, 거들먹거리는 손짓. 딱히 보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막상 보이지 않게 되니까 이상하고 가슴 한쪽에 구멍이 뚫린 것 같기도 하다. 지겹고 끔찍할 정도로 싫고 미웠던 놈인데, 막상 죽어서 사라져 버리니 안되었다.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예전보다 화는 좀 덜 내 줄게. 아예 안 낼 수는 없고, 네 성격이 그 따위니까. 밥은 햄버거를 삼키며 생각한다.
그렇지, 햄버거.
행맨은 햄버거는 사다 주길 거부했다. 커피를 사다 줬으면 됐지 햄버거까지 심부름을 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커피건 햄버거건, 모두 네가 제안했던 거라고 대들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그는 밥을 직접 만나서 햄버거를 사주겠다고 했다. 밥이 화를 냈다.
"그럼 내가 널 만나러 와야 하잖아! 그러기 싫어. 그리고 그럴 시간이 어딨어, 차라리 배달시켜 줘."
"아니, 그래야 나 보기 싫어서라도 네가 햄버거를 덜 사달라고 할 거잖아. 사주는 건 나니까 내 방식에 따르시지."
그래서 밥은 한달 동안 13번 정도 햄버거를 행맨에게서 얻어먹었다. 점심이나 저녁 야근 때 어떻게든 행맨을 찾아가서 뜯어먹었던 것이다. 행맨은 독한 놈이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그를 따라 햄버거 가게에 가서 그가 원하는 세트 메뉴를 주문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햄버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핫도그라도 주문해서 우물거리며, 밥이 먹는 내내 옆에 앉아 있었다.
"햄버거만 사 주고 먼저 가라니까. 네가 왜 여기 있어? 입맛 떨어지니까 사라지라고."
밥이 불평을 하면 행맨은 기분나쁜 웃음을 띄고 어린애한테 말하듯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주는 것이다.
"입맛 떨어지게 해서 다음엔 안 먹게 하려는 게 목적인데 가 버리면 되겠어, 베이비? 그리고 햄버거에 입맛 떨어질 놈이냐, 네가. 똥통에 빠져도 햄버거는 먹고 있을 놈이."
"아 진짜 입맛 떨어지게!"
그러고 보면 녀석이 가엾기도 하다. 젊은 나이다, 서른 둘. 한창때지. 그런데 가 버렸다. 결혼도 못 했고 아이도 없고, 그냥 혼자 있다가 가 버렸다. 그랬는데 과부는 만들었다.
어쩌다 한번씩, 건물 귀퉁이를 돌 때나 카페에서나 바에서, 밥은 낯익은 짧은 금발을 보고 눈을 떼지 못할 때가 있었다. 분명 아닌 걸 알면서도 비슷한 머리형을 보거나 체형이 비슷한 사람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한번 쿵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행맨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한 다음엔 밥의 가슴에 뚫린 구멍으로 시린 바람이 불었다. 그렇지. 행맨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 또 잠깐 잊었나 보다. 없으니까 심심하네. 그렇지. 심심한 거야. 허전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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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 훈련은 스크리밍 이글스와 비질란테가 늘 한 팀이 되거나 적이 되거나 해서 하여튼 함께 하는 게 그동안의 불문율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밥도 모른다. 그저 계획표를 받아보면 늘 그렇게 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런 것이 이번 훈련에는 두 부대가 한번도 맞붙지 않았다. 훈련 세부일정을 들여다 보며 밥과 그의 복좌기 파일럿이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질란테가 행맨이 없다고 꼬리를 내렸나?"
톰이 내뱉어 놓고 아차 싶은지 입을 막았다. 밥은 눈을 굴렸다. 톰이 미안해 하며 다시 말했다.
"하긴, 그동안엔 이상할 정도로 비질란테랑 우리랑 맞붙곤 했지. 아마 행맨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이번엔 우리랑 안 붙기로 했나 보다."
그러고 보면 유난히 스크리밍 이글스와 연합 행사가 많던 비질란테다. 밥은 오후에 기지 훈련지원팀으로 가서 부대간 합동훈련은 어떻게 매칭이 되었는지 물었고, 담당자는 '실력과 규모가 비슷하고 서로 원하는 부대들끼리 묶어준다'고 대답했다. 스크리밍 이글스가 늘 비질란테와 상대가 되었던 이유를 묻자 담당자가 몇가지 서류를 뒤져 보더니 알려주었다.
"전부 비질란테 쪽에서 스크리밍 이글스를 지목해서 신청했습니다. 훈련 인원, 대상자 명단까지 모두 지정해서요."
그가 보여준 서류를 쭉 넘겨보던 밥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파일철을 덮었다. 계획 입안자가 모두 제이크 세러신이었기 때문이다. 행맨이 요청하면 훈련 담당자가 이글스에 물어보고 이의가 없으면 받아들여 준 것이다. 이글스 쪽 담당자는 줏대없는 놈이라 하자면 하자는 대로 다 해줬겠지. 행맨 놈은 그렇게까지 밥을 눌러 이기고 싶었던 걸까, 라고 생각했다가 밥은 자신이 그만큼 중요한 인물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의심을 접었다. 그냥 이글스가 만만했던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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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꽃 몇송이를 사들고 군인묘지를 찾았다. 터벅터벅 걸어가서 누가 봐도 아직 새 무덤인 곳에 서서 묘비 앞에 꽃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푸념을 시작했다.
"행맨. 네가 좋아하는 장미꽃이야. 내가 앤더슨 대령님 승진 축하연에 해바라기를 들고 갔다가 네가 어디 해바라기 따위를 들고 오냐고, 장미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난리를 쳤던 게 기억나서 말이야. 장미를 그렇게나 찬양하던 네가 나를 사랑했을 거라고 사람들이 믿는 게 너무 웃기지 않아? 나랑 장미랑 어디가 닮았냐고. 난 잘 해 봐야 투박한 해바라기일 뿐인데.
임마, 난 네가 정말 지긋지긋해. 너랑 싸울 때도 지긋지긋했고 너랑 얽히는 모든 순간이 지긋지긋했어. 그랬는데 네가 죽고 나서 더 지긋지긋한 꼴을 겪고 있어, 알아? 난 너한테 잘못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시달려야 하냐. 결혼한 적도 없는데 난 네 과부가 돼 버렸다. 사람들이 다 날 밥 플로이드 세러신으로 본단 말야. 그 미친 편지때문에 난리도 아냐. 날 보고 키득키득 웃는 놈들도 있어. 믿어져? 아니 내 전립선이 너랑 무슨 상관이냐. 널 잃은 슬픔을 달래는 중인 줄 알고 아무도 나한테 데이트 신청도 안하고 플러팅도 안해. 네가 내 앞길을 완전히 막아버렸잖아. 나한테 왜 이래. 나한테 왜! 왜 죽어서까지 날 괴롭혀. 왜 죽어서 날 괴롭히냐고!"
밥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서 마지막은 절규처럼 변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이나 거기 서 있었다. 군화에 똑 똑 떨어지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이다.
행맨밥 파월풀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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