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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맨이 기억을 잃고 서서히 멀어지는 행맨밥 6앱에서 작성

ㅇㅇ 24-03-3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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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맨이기억을잃고서서히멀어지는 몇해 전, 제이크가 가족들에게 로버트와의 관계를 밝히기로 한 것은 그리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니었다. 사실 제이크는 로버트의 부모님과 만난 뒤로 쭉 그러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가족과 그랬듯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받아들여지고, 언젠가 식사 정도는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아마 한바탕 난리가 날 걸. 제이크는 부러 가볍게 말했지만 로버트는 그가 오래 고민하고 어렵게 결정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핏 들은 바로 그의 어머니는 꽤 독실한 크리스천인데다 아버지는 텍사스 주 공화당 의원이었으니, 아무래도 긍정적인 반응을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로버트는 태연해 보이는 제이크의 표정에서 자신만이 알아챌 수 있는 근심, 그럼에도 고개를 든 약간의 기대감 또한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크가 본가에 다녀온 날이었다. 평소와 달리 무거운 분위기로 집에 들어서는 그를 보고 로버트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자켓을 벗는 제이크의 미간과 턱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이크, 어땠어?” 이미 답을 알 것 같았지만 침착하게 물었다. 그는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입술을 몇번 축이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로 좋지 않았어. 아니, 실은 최악이었지.” 그러고는 자조적으로 웃어버리는 제이크를 로버트는 별말없이 안아주었다. 제이크는 순순히 안겨 몸을 의지했다. 로버트는 사실 어느 정도 기대를 내려놓고 있었지만 정작 매마른 얼굴로 애써 상처를 보이지 않으려 하는 제이크를 보니 마음이 쓰렸다. 품 안에서 가만히 숨쉬는 제이크를 꼭 감싸면서, 자신이 그와 체구가 비슷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짧게 깎아서 까슬한 짙은 금발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게 해 그의 얼굴을 손에 담았다. 로버트의 손은 꽤 큰 편이어서 제이크의 얼굴을 거의 다 감쌀 수 있었다. 제이크가 그 손에 입술을 묻고 눈을 맞춰왔다. 웃음기를 잃은 녹색 눈을 들여다보면서 로버트는 안타까운 애정과 보호본능을 느꼈다. 그는 한껏 약해져 있는 제이크에게는 그보다 더 한없이 약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후로도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제이크는 몇 번이고 진전 없이 본가에 다녀왔다. 그는 점점 실망에 익숙해져갔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의 조용한 사투를 묵묵히 지켜보던 로버트는 어느날 그에게 둘이서 같이 부모님을 만나보자고 제안했다. 본인은 잘 감췄다고 생각하지만 전보다 어딘가 결핍되어 보이는 제이크를 보는 게 싫었고 이왕이면 함께 부딪혀보고 싶었다. 제이크는 절대 안 된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로버트의 집념이 그를 이겼다. 나타샤나 브래들리는 로버트가 제이크에게 대체로 순순히 따라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못말리는 쪽은 제이크가 아니라 그였다. 어쩌다 한번 확고한 마음이 뿌리를 내리면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 몇번의 작은 언쟁 끝에 제이크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래봤자 부모님이 만남을 거부할 게 뻔하다고 그는 장담했지만 웬일인지 긍정의 답이 돌아왔고, 그렇게 로버트는 처음으로 세러신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시도의 끝은 좋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제이크와 닮은 얼굴을 한 두 사람을 마주하며 로버트는 땀으로 잔뜩 젖은 손을 연신 바지에 닦아야 했다. 레스토랑 안쪽 프라이빗 룸의 화사한 인테리어도 경직된 분위기를 감춰주지 못했다. 로버트는 최대한 담담하게 세러신 부부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제이크의 아버지, 마틴 세러신은 딱딱한 태도로 악수하며 짧게 통성명했다. 그는 아무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나마 웃으며 인사해 준 쪽은 어머니인 미셸 세러신이었다. 어색한 인사 뒤 적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제이크가 뭐라 말문을 트려 입을 여는 순간 마틴이 먼저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사실 둘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닙니다.” “아버지.” “아니, 제이크. 아무래도 한 번 더 확실히 말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러려고 온 거야.” “일단 식사나 좀 하고 얘기해요.” 미셸이 조용히 옆에서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좋은 분위기로 이 상황을 넘기려는 생각이 없어보였다.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마틴이 로버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플로이드 씨, 당신에게는 유감 없습니다. 솔직히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 게 나도 편치만은 않아요.” 처음부터 바로 본론을 내밀 줄은 몰랐던 로버트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괜히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마틴은 두통이라도 호소하듯 이마 쪽에 손을 댔다가 다시 떼며 말을 이었다. “난 내 신념에 따라 제이크를 키웠고 이 애를 30년을 넘게 봐왔습니다. 누구보다 내가 제이크를 잘 알고 있단 말입니다. 제이크는 평생을 이성애자로 살았고 그건 꾸며낸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고 와서는, 이해해달라니.. 난 그럴 수 없어요.” “아버지라고 저에 대해서 모든 걸 알지는 못해요, 저조차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제이크가 끼어들었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드리죠. 하지만 몇 번을 얘기해도 마찬가지예요. 아버지 생각에 제가 응할 일은 절대 없다고요.” “생각할 시간이라면 내가 아니라 너에게 필요해 보이는구나. 그동안 네가 진지하게 만났던 여자가 몇이나 되는지는 스스로 제일 잘 알 테지. 심지어 에이미와는 거의 약혼까지 할 뻔하지 않았냐?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그만- 이제 좀 그만 하세요! 매번 지긋지긋하게 옛날 얘기만 물고 늘어지지 마시고. 전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 뿐이에요, 대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데요?” 묵묵히 듣고 있던 미셸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이크, 우리는 이런..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단다. 너가 이해하지 못하듯 우리도 마찬가지야. 게다가 지금까지는 전혀 그런 단서조차 주지 않았잖니.” 몇번이고 반복된 대화를 다시 하는 것처럼 제이크는 지쳐보였다. “더 이른 시점이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그것도 아니잖아요. 어머니, 전-” “우리의 뜻은 충분히 전한 것 같구나. 이미 여러번 말했지. 이제는 플로이드 씨도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제이크의 말을 끊고 마틴이 다시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겨냥하는 말에 로버트는 움찔했다. 옆에서 제이크가 작게 떨리는 헛웃음을 뱉는 소리가 들렸다. 로버트는 입을 달싹이며 쉽게 할 말을 고르지 못했다.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숨을 한번 몰아쉰 뒤 모은 두 손을 꾹 다잡고는 입을 열었다. “저 제이크를 정말 좋아해요. 제이크도.. 마찬가지고요.” 그 말을 하면서 마틴의 눈을 피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제이크가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혼란스럽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만, 저희 둘 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러는 건 아닙니다. 그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해요. 뭘 원하시는지 알아요, 하지만 저희는 그 뜻대로 해드릴 수 없어요. 물론 바로 마음을 열어달라는 말은 아니예요. 그냥.. 조금만 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마주본 마틴의 굳은 얼굴에서는 어떤 감흥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옆으로 눈길을 돌리자 미셸과 눈이 마주쳤고, 복잡한 표정의 그녀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미셸이 입을 열 새도 없이 마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마음은 변하지 않아요. 당신만의 문제였다면 그래도 존중했겠지만.. 내 아들이 관계된 이상 그럴 수가 없군요. 괜한 희망을 주는 건 더 아니라고 봅니다. 제이크도 당신도, 얼마든지 다른 선택지가 있지 않습니까. 피차 어려운 길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제이크가 식탁 위로 주먹을 쥔 채 그의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로버트는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 그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뭐.. 그래봤자 둘 다 성인이고 이 이상 내가 간섭하기는 힘들겠지요.” 마틴은 조금 피로한 듯 잠시 말을 멈춘 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어차피 끝이 있는 관계라면, 결국 언젠가는 스스로 그만둘 때가 오지 않겠어요?” 탕, 하고 식탁을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제이크가 일어났다. 놀라서 시선을 올리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험악한 얼굴의 제이크가 보였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씩 내뱉었다. “오늘 이 자리를 만든 건.. 고작 인정이나 받자고 그런 게 아닙니다. 한 번 더 기회를 드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걸로 끝이에요. 그만 단념할게요, 제가.” 로버트가 제이크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그의 눈빛은 분노로 형형했다. 제이크를 바라보는 미셸의 눈동자에 불안이 깃들었다. “이 이상 저희에 대해 함부로 말씀하시는 걸 듣고 있을 만큼 비위가 좋지 못해서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앞으로 자주 볼 일 없을 겁니다.” “잠깐만, 제이크-” 로버트가 그를 불렀을 때 그는 이미 문을 열고 나가고 있었다. 로버트는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세러신 부부에게 황급히 인사를 하고는 그를 따라 나섰다. 운전석에 앉아 화를 삭이는 제이크를 로버트는 애써 달랬다. 섣불렀던 것 같다고,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말에도 제이크의 태도는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말해도 소용 없어. 포기하지 않으면 또 오늘처럼 그런 거지같은 소리만 듣게 될 거야. 난 부모님을 잘 알아, 기다리다가는 우리가 지쳐.” “하지만..” “로버트, 너는 이 문제에 대해 더이상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우리 사이에 변하는 건 없으니까.” 하지만 어떤 일들은 기다려야만 답이 돌아오는 걸. 그러나 로버트의 설득은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제이크는 로버트를 위해 단번에 가족들을 등돌렸다. 그의 앞에서 관계의 끝을 종용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제이크를 돌아서게 했다. 로버트는 아직도 그 일에 대해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고집을 부려 그렇게 섣불리 함께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면 좀 더 유예기간이 있지 않았을까, 시간을 가지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내면 제이크는 딱 잘라 이야기를 끝내려고 했다. 됐어, 신경 쓰지 마, 이제 우리와는 상관없어. 그 뒤로 제이크는 가족들과 교류를 끊다시피 해서 로버트도 그들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제이크는 더이상 본가에 가지 않았고 가족과 연락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진급식에 부모님이 왔을 때 그들 사이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마틴은 불편한 표정으로 둘을 외면했고, 미셸은 가족들에게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제이크를 어두운 안색으로 바라보며 침묵할 뿐이었다. 로버트가 좀 유한 태도를 취해보는 건 어떠냐고 조심스레 말해봤지만 제이크는 완강했다. 그는 한 번 결심한 것은 좀처럼 번복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제이크가 종종 어머니의 부재중 전화가 표시되어 있는 화면을 오랫동안 내려다본다는 걸 알았다. 그날의 일로 로버트가 큰 상처를 받았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마틴의 말대로 어차피 그가 개입하는 건 한계가 있다.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로버트가 제이크를 사랑하고 제이크가 로버트를 사랑하는 한 그들의 관계가 변할 일은 없다. 하지만 마틴의 말은 로버트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어떤 의심에 작은 입김을 불어넣었다. 적어도 제이크에게는 자신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었다는 의심. 로버트는 제이크의 인생에서 가장 개연성 없는 사람이지 않은가. 제이크가 그 전까지 이성만 사귀었다는 점을 떠나서도 둘은 모든 게 정반대였고, 어쩌다가 친구 사이가 된 것조차 신기한 일이다. 로버트가 그토록 기다리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관계였다. 그에게 선택하기를 요구하지 않았다면, 그날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까지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친구 관계로 지내다 흩어지도록 두었다면 두 사람은 결국 자연스럽게 멀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로버트는 생각했다. * 로버트와 제이크는 정오가 되기 전에 집을 나서 공항으로 출발했다. 느즈막한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전날 잠을 설친 바람에 영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제이크의 본가에 방문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의 부모님을 제대로 대면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전의 기억이 썩 좋지 못해 다시 만날 생각에 초조해졌다. 적어도 초대를 해주었으니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허락을 청하는 제이크의 말을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미치면 다시 자신감이 떨어졌다. 이틀 전 제이크가 텍사스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보였다. 부모님이 둘의 관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지는 모르는 듯했다. 세러신 부부는 불편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려 하지 않았을 것으로 로버트는 짐작했다. 로버트 또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는데, 말하기 껄끄럽기도 하거니와 예전의 제이크는 그 화제를 최대한 피하려고 했기에 말을 아끼는 게 로버트에게도 습관이 되었던 것이다. 텍사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로버트는 꾸벅꾸벅 졸며 시간을 죽였다. 제이크는 로버트가 가져온 책을 읽고 있었다. 이륙한 지 몇십 분이 지나고 로버트가 창가에 기대 쪽잠을 자고 있는 동안 구름 밖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태양빛이 얼굴로 내리쬤다. 옆에서 제이크의 손이 뻗어오는 게 느껴져 희미한 의식으로 눈을 떴다. 그는 조용히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리고는 로버트를 한 번 살피더니 다시 몸을 물렸다. 눈을 찌르던 감각이 사라지고 제이크의 옅은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햇빛에 찡그려진 미간이 슬그머니 펴졌다.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착륙을 안내하는 음성이 기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창문 쪽으로 기울었던 로버트의 고개는 어느새 제이크의 어깨에 완전히 기대어진 채였다. 로버트는 잠에 취한 채 제이크가 깨울 때까지 기다릴 셈으로 그대로 부스스하게 눈만 깜빡이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제이크는 한참이 지나도 그를 깨우지 않았다. 그는 로버트의 머리에 자신도 고개를 툭 기대고서 승객들이 줄지어 나가는 모습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을 즈음 로버트는 막 잠에서 깬 시늉을 하며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로버트는 금세 텍사스의 날씨가 싫어졌다. 늦은 오후인데도 태양은 힘을 잃지 않고 한껏 열을 발산했다. 택시 안의 빈약한 에어컨 바람으로는 더위를 물릴 수 없었다. 제이크도 쓰고 있던 캡모자를 벗어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댈러스 북서쪽으로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크의 본가가 위치한 사우스레이크에 도착했다. 큰 복층 주택이 즐비한 도로를 지나며 로버트는 저마다 다르게 가꿔놓은 넓은 마당들을 구경했다. 제이크가 택시를 멈춘 곳은 커다란 인조 연못을 끼고 다른 집들과 조금 떨어져 있는, 가장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하얀 벽면의 근사한 저택이었다. 집을 향해 놓여 있는 반듯한 길 앞에 차를 세웠을 때 미셸은 이미 넓은 마당까지 나와있었다. 차에서 내려 작은 자갈들을 밟으며 몇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그들 앞으로 미셸이 훌쩍 다가왔다. 제이크는 반갑게 그의 어머니와 포옹하고 볼에 입을 맞췄다. 미셸은 성인 남자조차도 숨이 막힐 만큼 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짙은 금빛 머리카락이 제이크의 머리와 똑같이 반짝였다. 그녀는 아들을 맞은 다음 어정쩡하게 서있는 로버트의 어깨를 한 손으로 살짝 잡았다 놓고는 웃으며 반겨줬다. “잘 왔어요.” 기억보다 훨씬 부드러운 표정을 마주하자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로버트는 뒤쪽에 있는 마틴을 눈으로 좇았다. 그는 느릿하게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제이크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 나름대로의 반가움을 표했다. 그가 제이크에게서 로버트에게로 눈을 돌릴 때 로버트는 저도 모르게 볼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오래 전에 한 번 봤었죠? ..플로이드 군.” 마틴이 잠깐 뜸을 들이다 말했다. 로버트는 조금 부산스럽게 그가 내민 손을 잡아 악수하며 마주 인사했다. 마틴은 언뜻 보기에도 살가운 사람은 아니라 그의 기분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적어도 기분 좋은 그를 로버트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얼굴에 그럴듯한 미소가 걸려있다 하더라도, 그게 정말 그의 기분을 반영하고 있는지 로버트는 몰랐다. 어쨌든 인상을 쓰고 있지 않았으니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드넓은 응접실을 가로질러 안내해주는대로 주방에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당연히 사용인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식사 공간에는 그들 뿐이었다. 미셸이 주방을 오가며 그릇을 옮기기 시작해 로버트와 제이크도 손을 거들었다. “레이첼은 휴가를 보내줬어. 오늘은 직접 준비하고 싶었거든.” 미셸이 식사 준비를 마저 하는 와중에도 그들에게 쉬지 않고 말을 걸었는데, 그 덕분에 로버트는 마틴과 직접적으로 말을 섞을 틈이 없었다. “많이 더웠죠? 하필 8월에 오다니 운이 나빴어요.” 미셸이 반짝이는 식기를 정확한 각도로 다시 바로잡으며 환하게 말했다. “네, 캘리포니아도 저에겐 충분히 더웠는데.. 이젠 불평하지 말아야겠네요.” “어머. 거기만큼 날씨 좋은 데가 어딨다고 그래요.” “하하- 텍사스에 온 걸 환영해, 로버트.” 제이크가 찹 하고 소리가 나게 로버트의 등을 두드리고는 익살스레 말했다. 로버트는 아까부터 제이크가 그의 가족과 대화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니 생소했다. 좋은 분위기에서 웃고 떠드는 세러신 가족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제이크는 내내 즐거워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로버트는 그가 진정으로 기쁘거나 즐거울 때 얼굴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알았다. 입가를 가르는 시원스러운 곡선의 기울기와 보기 좋게 휘어진 눈매에는 애정과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제이크는 그의 가족을 정말로 사랑한다. 모두가 식탁 의자에 자리를 잡아 앉았고, 미셸이 마지막으로 깊고 넓직한 그릇을 가져와 하얀 유리 뚜껑을 열었다. 김이 적당히 피어나 먹음직스러운 향을 퍼뜨렸다. 그 냄새를 맡음과 동시에 음식을 확인한 로버트의 눈이 커졌다. 그건 로버트가 가장 좋아하는, 제이크만의 요리였다. “로버트도 이거 좋아해요.” 제이크가 로버트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이 레시피 어머니한테 배웠거든. 어릴 때부터 자주 해주셨어.” 그러고는 다 들리게 속삭였다. “지금은 내 실력이 더 나아.” 미셸이 의자 뒤로 지나가면서 아들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리자 제이크가 피하는 시늉을 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로버트는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냥 고등학교 졸업하고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 만든 레시피야. 예전에 로버트가 그의 요리에 대해 물었을 때 제이크는 그렇게 대답했다.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로버트는 어머니와 함께 요리하는 제이크를 상상해보았다. 어머니의 레시피를 그대로 배우는 모습. 장난스럽게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모습. 세러신 가족의 풍경. 그릇에 덜어 음식을 한입 먹어보니 놀라울 만큼 똑같은 맛이었다. 식사가 시작되고, 대화가 오갔다. 로버트는 조심스럽게 맞장구 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제이크는 한번씩 로버트를 언급하며 자연스럽게 그를 대화에 합류시켰다. 여전히 마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건 힘들었지만, 생각보다 그는 크게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고 가끔씩 로버트가 하는 말에 평범하게 고개를 끄덕여 반응해주기도 했다.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만 그들의 대화에 발을 걸쳐놓고 있으니 로버트도 어느새 조금 편안해졌다. 사실 그가 했던 말들의 대부분은 음식에 대한 칭찬이었는데, 모두 진심이었다. 제이크는 분명 미셸에게서 요리 실력을 물려받았다. 세러신 가족은 생각보다 별 것 아닌 것들로 농담을 하고는 했고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여느 화목한 가정과 다를 것 없는, 혹은 그보다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반가워하실 소식이 있어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제이크가 마틴에게 말했다. “저 다음주에 복귀해요. 그래서 한동안은 바빠서 못 올 거예요.” 마틴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끈다 했다.” “뭐, 나름대로 앞당긴 건데요.” “사실 난 네가 지금쯤 진작 중령은 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제부터 많이 분발해야겠구나.” “하여간 여유를 모르는 양반이시라니까. 전 한참 전부터 남들보다 앞서고 있었으니까 걱정 마세요. 지금이야 겨우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겠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죠.” “여전히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구나.” 미셸이 장난스럽게 비꼬자 제이크는 윙크로 답했다. 마틴은 코웃음을 쳤지만 로버트는 그제야 마틴이 진정으로 기분이 좋을 때 짓는 표정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제이크 어릴 때 어땠는지 궁금하죠?” “오, 이런.” 미셸이 눈을 빛내며 말하자 제이크가 탄식했다. “그 에고가 이렇게 그대로 커버릴 줄은 몰랐는데. 가정교육이 이 모양이라 미안하게 됐어요, 로버트.” 로버트는 웃음을 터뜨렸고 제이크는 악동 같은 얼굴로 씩 웃었다. “안 그래, 마틴?” 미셸이 자연스럽게 마틴에게 말을 넘기며 어서 이야기에 보탬이 되라는 듯이 그에게 눈짓했다. “…여러모로 보통 놈은 아니었지.” 마틴은 떠넘겨진 화제를 마지못해 받아주며 눈을 굴렸다. 그는 제이크를 보며 포크를 들고 있는 쪽의 손가락을 그가 있는 방향으로 살짝 흔들더니 말을 이었다. “어릴 때는 못말리게 승부욕이 강해서 여기저기 싸우고 다니는 걸 말리기 바빴다. 머리가 좀 크고 해군사관학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뒤에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발산됐으니 다행이다만. 그 승부욕과 집요함이 결국 네 무기가 되더구나.” 마틴은 먼 과거를 떠올리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젠가 태평양을 네 아래에 두고 싶다고, 해사에 입학하기도 전에 지겹도록 말하고 다녔지.” 로버트는 마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다. 생각해보면 제이크는 언제부터인가 어릴 적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제이크는 또 시작이라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십대들은 자기 꿈을 떠벌리지 않고는 못 견디니까요.” “심지어 열 다섯 살에는 존 글렌의 사진에 대고 그보다는 대단한 인간이 되겠다고 했었지. 난 또 그렇게 오만한 장래희망은 처음 들어봤다. 그보다는, 이라니. 그게 누군지나 알고 말한 건지. 나중에는 그걸로 모자라 카잔스키 사령관을 들먹이면서..” “그 얘기는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제이크가 민망한 듯 로버트를 곁눈질하고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마틴의 얼굴에 제이크와 닮은 미소가 떠올랐다. “내 자식이지만 참 건방졌어. 하지만 뭐 그래, 네 능력이라면 그 넘치는 자신감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다.” “이야, 오늘따라 칭찬이 격한걸요.” 부자 사이에 웃음이 오갔다. 미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즐거움을 숨기지 않았다. 마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사이 로버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몇 년 잃어버린 일은 별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과거야 어차피 지나면 그만 아니냐. 미래가 중요하지, 바라던 곳까지 올라가 있을 미래가.” 그가 음식을 입에 넣고 천천히 음미하며 삼킨 뒤, 음식의 맛을 품평하는 듯한 평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 때가 되면 네 주변도 많이 달라져 있어야 할 거다.” 로버트는 움직임을 멈췄다. 마틴의 마지막 말이 몸의 온도를 서서히 낮추는 듯했다. 건너편에 있는 미셸의 미소가 아주 미세하게 사그라들었다. ‘몇 년 잃어버린 일’과 ‘주변’이라는 게 결국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로버트는 모를 수가 없었다. 제이크는 의아한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무슨 뜻이에요?” 마틴이 바로 뭔가 대답하려 입을 여는 순간 미셸이 그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부부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둘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무언가가 깨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로버트는 알았다. 미셸은 남편에게 무언의 눈짓을 했고, 그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그 뜻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미셸의 눈이 로버트를 향했을 때 언뜻 미안한 기색이 스쳤다. 제이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여전히 자신의 아버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너가 어련히 잘 하겠지.” “그러니까 뭘-” 그때 로버트가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하는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로버트는 식탁 가운데에 소스만 남은 파스타 그릇을 들며 어정쩡한 자세로 말했다. “접시가.. 비어서요. 제가 더 가져올게요.” “이리 줘요, 내가 하면 돼요.” 미셸이 손사레를 치며 로버트를 다시 앉혔다. 그녀는 식탁 뒤쪽에 비치해놓은 큰 프라이팬에서 파스타를 덜면서 능숙하게 화제를 다시 이끌었다. 미묘한 긴장감의 흐름이 끊기고 다시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다. 로버트는 미셸과 제이크가 말을 주고받는 동안 마틴 쪽을 바라보았다. 마틴도 시선을 느끼고 로버트를 마주봤다. 그의 눈은 제이크의 눈과 닮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오래 전에 말한 것처럼, 마틴은 로버트에게 정말 아무런 유감도 없어보였다. 적대감도 혐오도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그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을 보는 무관심만 있었다. 실수로 물을 쏟은 직원에게 보내는 가벼운 힐난에 지나지 않는 정도의 무관심. 그에게 있어서 로버트는 사실상 그의 아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적어도 그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다시 활기가 돌았지만 로버트의 귀에는 그들의 대화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식사가 마무리된 뒤 제이크가 부모님과 로버트를 모두 물리고 혼자서 접시들을 식기세척기에 넣는 작업을 하는 동안 로버트는 양해를 구한 뒤 화장실로 향했다. 집이 넓어 설명을 듣고서야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아까부터 숨이 막히는 기분 때문에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고, 화장실은 그저 빠져나오기 위한 핑계였다. 로버트는 집 안을 몇바퀴 맴돌다가 방향을 틀어 아까 눈여겨봤던 테라스가 있는 복도로 향했다. 커튼에 반쯤 가려진 유리문의 손잡이를 잡고 문을 살짝 여는 순간, 바깥 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이미 마틴과 미셸이 나와 있었다. 로버트는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미셸은 마틴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지 말았어야지. 잠깐이라도 그 고집 좀 내려놓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별 말도 아니었어. 난 그저-” “마틴. 나와 약속했잖아. 잊었어?” “…” “난 또다시 저 애를 잃을 수는 없어.” “미셸, 내가 당신 뜻대로 잠자코 있었던 건 그저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저 둘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당신 정말-” “그 때 제이크를 집에 와 머물게 했다면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을 테지.” “잘됐다는 듯이 말하지 마. 제이크는 거의 죽을 뻔했어.” 마틴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이건 사고와는 상관없는 얘기야. 미셸.. 당신도 모르지 않겠지. 걔는 제멋대로인 것 같아도 한 번도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 그리고 그걸 기꺼워했다고. 어쩌다 만난 사람 하나 때문에 잠깐 방향을 잃은 거지, 늦든 이르든 제이크는 제자리로 돌아오게 돼 있어.” “..우리 둘 다 그럴 줄 알았지만 결국 틀렸잖아. 그래서 그 애와 완전히 멀어졌고. 자식을 잃어도 될 만큼 중요한 건 없어, 보아하니 당신은 아닌 것 같지만.” “아니, 자식을 잃지 않기 위해 이러는 거야. 제이크는 언제부터인가 스스로를 잃었어. 이제 다시 찾을 때가 된 거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미셸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난 이제 제이크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 “제이크가 뭘 원하는지 당신이 알아? 정말 그 때와 같은 걸 원한다고 생각해? 걘 지금 어중간하게 시간을 끌고 있을 뿐이야. 상황이 달라진 걸 받아들여야지. 당신도, 제이크도, 그 사람도.” 마틴의 말에 미셸이 뭐라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로버트는 더이상 엿들을 수 없어 몸을 물렸다. 그는 천천히 어두운 복도를 다시 걸어서 불이 꺼진 화장실로 들어갔다. 닫힌 문에 기대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자 벽의 새하얀 타일이 눈을 찔렀다. 로버트는 차가운 고요 속에 들어오고 나자 마비되었던 생각이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로버트는 과거 제이크의 폰에 어머니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찍혀 있던 것을 기억했다. 부재중 기록 화면을 내려다보던 제이크의 뒷모습도. 미셸은 제이크와 멀어진 일을 줄곧 후회했다. 그래서 제이크가 그들을 다시 가족으로 맞았을 때, 그대로 자식과의 연을 되찾고 싶었을 것이다. 제이크가 누구를 만나는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방관적인 침묵을 보이지 않고 순수한 환대로 자신을 맞아준 그 얼굴을 로버트는 그제서야 이해했다. 미셸은 그렇게 온전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마틴에게서 모종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는 표면적으로나마 그녀의 뜻에 따라 제이크를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마틴은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기억에 없는 연인과의 관계가 가봤자 얼마나 가겠나,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결국에는 끝날 수밖에 없는 관계라고. 마틴은 스스로 장담했던 대로 전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단지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제이크가 로버트를 집으로 데려오자 감춰온 마음을 무심코 내비친 것이다. 그의 말대로 정말 서서히 멀어지다 관계가 끝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지. 그게 당연한 건지도. 터질 것 같이 마구 흘러가는 머릿속에 그런 생각들이 섞여들었다. 제이크가 퇴원하고 얼마 안 돼 본가에 다녀온 뒤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부모님, 너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더라.’ 말 그대로 그의 부모님은 로버트에 대해, 그들의 관계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나쁜 이야기도 좋은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이크가 로버트를 만나기 전처럼, 사이가 좋은 평범한 가족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미셸과 마틴은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세러신 가족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모두가 입에 올리지 않은 갈등은 자연스럽게 숨겨졌다. 그래서 제이크는 로버트를 본가에 초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로버트 또한 과거의 일을 들추기를 원하지 않았다. 제이크가 또다시 로버크와 가족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제이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예전 그대로의, 가족을 잃지 않은 제이크를 로버트는 처음으로 직접 보았다. 제이크의 진심 어린 웃음,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요리. 그날 보았던 것들이 로버트의 눈앞에 스쳤다. 그가 해주는 음식을 몇 번이나 먹으면서도 그게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로버트와의 추억이기 이전에 가족과의 추억이었다. 제이크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상실을 로버트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로버트는 제이크가 가족들과 연을 끊은 것이 늘 안타까웠지만 제이크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걸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이해해본 적도 없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티끌 없이 깨끗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타일의 색을 흡수하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아까 먹은 게 탈이 났는지, 명치가 날카롭게 아파왔다. 화장실을 나와 다시 긴 복도를 걸어가는데 고풍스러운 수납장 위를 장식하고 있는 것들이 보였다. 아까는 정신없이 길을 찾느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크고 작은 사진들이 반듯하게 액자에 담겨있다. 거기에는 제이크의 시간이 있었다. 유년기,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진들. 그의 풋풋한 활기가 그대로 담겨있었다. 오른쪽에는 가족사진이 큰 액자 몇개를 채우고 있었다. 그 중 유난히 밝게 웃고 있는 제이크의 얼굴 위로 손가락 끝을 스쳤다. 신경써서 관리했는지 먼지 하나 없이 매끈했다. 어깨에 온기가 내려앉았다. 화들짝 놀라 옆을 보니 제이크가 있었다. “하도 안 오길래 길이라도 잃은 줄 알았네. 이거 보고 있었구나.” 그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개구지게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10살 정도 되어보이는 제이크의 사진에 로버트의 시선이 닿자 그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사진들을 슬쩍 가렸다. “피곤해 보이네. 장단 맞춰주느라 힘들었지?” 제이크는 로버트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잠깐 위층으로 도망가자.” 그가 작당이라도 꾸미듯 속삭였다. 로버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자 그가 재촉하듯 등을 살며시 밀었다. “안 그래도 너 데리고 방 구경시켜주겠다고 말하고 왔어. 이리 와, 계단은 저쪽이야.” 그가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져 고마웠다. 게다가 제이크의 방이 정말로 궁금했다. 로버트는 제이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계단을 올라갔다. 방은 생각보다 아주 평범했다. 그곳은 자주 쓰지 않는 공간이었음에도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차분한 녹회색의 침구와 진갈색의 원목 가구들이 정갈했다. 로버트는 매끈한 책상 위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제이크는 책장에 꽂혀있는 락밴드 앨범과 책들을 훑으면서 소소한 옛날 얘기들을 꺼냈다. 혹시라도 뭔가 숨겨야 할 물건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는 것처럼 방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한 번씩 목 뒤를 쓸어내렸다. 쉬지 않고 말을 하는 모습을 보니 들뜬 것 같기도, 쑥쓰러운 것 같기도 했다. 방 끝 창가에서 쏟아지는 해질녘의 빛을 받은 제이크는 더 생기있고 어려보였다. 로버트는 그의 책상 오른편 벽면에 걸려있는 코르크 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 위에는 어딘가에서 오려온 듯한 종이들이 핀으로 고정돼 가득 붙어있었다. 자세히 보니 각종 기사와 책 내지를 스크랩한 종이들이었다. 역대 사령관들의 연표와 장교들의 활약상에 대한 기사, 저서들이 하나하나 정리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카잔스키 사령관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오, 이제 보면 정말 깜찍한 학생이었다니까.” 벽 앞에 멈춰서서 보드 위의 종이들을 하나씩 뜯어보고 있는 로버트 뒤로 제이크가 바짝 가까이 서며 웃었다. 그의 목소리가 바로 귀 옆으로 닿는데도 이상하게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공들여 만든 1미터 남짓의 보드 하나만으로도 제이크가 가졌던 꿈의 크기가 가늠이 됐다. 로버트 머릿속은 제이크에 대해 몰랐던 부분들을 소화하기 바빴다. 자신이 알던 제이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생각보다 일찍 전역할지도 모르겠네.’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떠오른 기억에 로버트는 제이크를 향해 물었다. “제이크, 너는.. 언젠가 전역하고 다른 일을 할 생각 해본 적 있어?” 제이크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살짝 갸웃했지만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 아니, 전혀. 아마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어릴 때는 좀 순진하고 객기 어린 마음에 하고싶었던 것도 있지만 지금도 뭐 생각은 비슷해. 무엇보다 내가 이 일에 탁월하고. 계속 진급해서 별 달아야지. 꼰대가 되긴 싫지만 꼰대들 밑에서 명령 들어주는 건 더 싫거든.” 제이크는 늘 하던 말을 새삼스레 다시 하듯 막힘없이 말하다가 갑자기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덧붙였다. “물론 넌 이미 나한테 지겹도록 들었겠지만..” 아니다. 제이크는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근데 왜? 너는 전역하고 다른 일 하려고?” 궁금한 듯 묻는 제이크에게 로버트는 그냥 가볍게 고개를 저어 대화를 맺었다. 식사 시간에 그의 아버지가 말했던 제이크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방 안의 벽 한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제이크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확고한 꿈을 가지고 있다. 왜 한번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그토록 오래 당연스럽게 가지고 있었던 야망을 자신에게는 보여준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침대맡에서 처음으로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도, 마치 그런 건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듯이 상반되는 말을 했다. 놀라움 뒤에 숨은 것은 배신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의 삶에서 중대한 일부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배신감. 기억 속의 제이크도 분명 성취욕과 투쟁심이 넘치던 사람이었다. 쉽게 원하는 것을 버릴 사람이 결코 아니다. 대수롭지 않게 전역하겠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었을까. 아니면 마음이 바뀐 걸까. 혹은 포기한 걸까. 그렇다면 왜? 불안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제이크에게 묻고 싶었다. 그래봤자 그는 대답해 줄 수가 없는데. 순간, 어쩌면 마틴이 말한 ‘정상궤도’라는 건 단순히 제이크의 연애에 국한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어도 군대와 정치계만은 위로 올라갈수록 보수적이다. 가장 위로 올라가고자 한다면, 어쩌면 로버트와의 관계가 그다지 유리한 조건은 되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더 비관적으로 봤을 수도 있다. 혹시 그게 제이크가 미래에 대한 계획을 바꾼 이유일까. 뭐가 됐든 제이크의 변화가 자신 때문이라면. 로버트는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아무것도 잃지 않은 온전한 그대로의 제이크. 이곳은 그런 제이크의 공간이었다. 그의 집이고 그의 삶이 있는 곳이었다. 로버트는 제이크 세러신을 모르고 있었다. 단 한번도 그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았음에도, 그에 대해 제대로 알았던 적이 없다. 로버트는 이방인이다. “너 안색이 창백한데.” 제이크가 얼굴을 가까이 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또 속이 안 좋은 거야?” 실제로 복부의 통증이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 반사적으로 옆구리를 짚는 로버트에게 제이크는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에 내려갔다. 잠시 후 그의 한 손에는 물컵이, 한 손에는 약통이 쥐어져 있었다. 로버트가 자주 먹는 소화제였다. 제이크는 물컵을 내려놓고 로버트의 손을 가져가서 그 위에 약 두 알을 올려주었다. “이거.. 너가 가져왔어?” 로버트가 묻자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혹시 몰라서 가방에 넣었지. 자주 체하잖아, 너.” 그가 물컵을 들어 건네주었다. “병원을 가봐야 하지 않아?” 로버트가 약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이크가 말했다. “됐어. 우리 어차피 정기적으로 검진 받잖아, 그동안 별다른 이상 없었는걸. 원래도 안 좋은 체질이었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점점 잦아지는 것 같은데. 시간 되면 따로 한 번 가보지 그래.” “으응.. 생각해 볼게.” 떨떠름한 반응에 제이크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너가 애냐, 병원 가기 싫어하게.” 그러고는 픽 웃는 제이트에게서 로버트는 그리움을 느꼈다. 로버트가 내켜하지 않는 베이비라는 애칭을 부르며 가끔씩 그를 어린애 취급하고는 했던 제이크의 모습과 눈 앞의 제이크가 겹쳐보였다. 속이 뒤틀리고 몸이 피로해 로버트는 저도 모르게 방 침대에 주저앉을 뻔했다. 쉬더라도 아래층에 인사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제이크가 그를 붙잡았다. “그냥 여기서 쉬고 있어. 내가 말하고 올게.” 로버트는 그의 말대로 했다. 상태가 안 좋기도 했고, 아래에 내려가 두 사람의 주목을 받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뒤 돌아온 제이크는 로버트의 가방을 가져와 방 안에 옮겨다주었고, 그의 뒤로 미셸도 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찻잔과 보온병이 올려진 작은 쟁반을 들고 있었다. 미셸이 침대에 앉아있는 로버트의 앞에 의자를 끌고 앉아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살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평소에도 가끔 이러거든요.” “몸살기운이 있다거나 그러진 않죠?” 미셸은 로버트의 이마에 손을 올려 온도를 확인했다. 어쩐지 어린 제이크의 경험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따뜻한 손길이 제이크를 닮았다. “일찍 쉬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제이크 시키고, 혹시라도 귀찮게 굴면 내쫓아버려요.” 제이크는 나가주지 않겠다는 듯이 미셸이 일어선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앉았다. 미셸은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 로버트의 손에 쥐어주고는 방을 나갔다. 로버트는 차를 몇모금 마신 뒤 아까부터 하고싶었던대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제이크가 이불을 끌어 덮어줬다. “네가 내 방에 있으니까 기분 이상하다.” 그가 턱을 괴고 로버트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 오히려..”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는지 그는 말을 맺지 않았다. “아무튼. 오늘 그냥 여기서 자. 원래 건너편 넓은 방이 네가 쓸 방이었는데 내가 거기서 자면 되니까.” 로버트는 알겠다고 하고는 제이크가 앉아있는 왼쪽으로 몸을 돌아누웠다. 몸의 긴장이 한결 누그러졌다. “어땠어?” 제이크의 물음에 로버트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다시 말했다. “우리 부모님 말야. 그리고 텍사스도.” “…만나뵈니까 좋더라. 두분 다 너랑 닮으신 것 같아.” “글쎄, 난 잘 모르겠던데. 어머니는 항상 나더러 아버지랑 판박이라고 말하기는 해. 내가 그렇게 꼰대 같나.” 제이크는 동의하지 않는 기색으로 툴툴거렸다. 로버트는 마틴의 눈을 떠올렸다. “눈동자 색이 너랑 똑같았어.”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제이크가 눈썹을 까딱 올렸다. 그러고는 곧 뭔가를 떠올린 듯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입꼬리가 찢어지게 활짝 웃었다. 그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초록색이지.” 제이크는 싱글거리며 마치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듯이 부러 눈을 지긋이 맞춰왔다. 그게 너무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워서, 로버트는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눈을 피하고는 나머지 질문에도 답해주었다. “그리고 텍사스는, 솔직히 별로였어. 더운 건 질색이라서.” 그에 제이크는 서운한 척을 하며 언젠간 제대로 여행을 시켜주겠다고, 그때는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말했다. 그 허여멀건한 피부를 구릿빛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 뒤로 시덥잖은 대화가 오가다가 서서히 잦아들고 로버트는 어느 순간 잠에 들었다. 드문드문 잠이 깰 때마다 이마와 볼이 간지러웠다. 제이크는 계속 곁을 지켰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제이크가 몇시까지 여기에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자러 간 듯했다. 로버트는 비척이며 일어나 화장실에 가 양치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불면을 틈타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제이크의 웃는 얼굴, 그의 가족과 꿈, 세러신 부부의 대화, 자신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던 제이크. 밤이 깊어질수록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새벽 시간은 놀랍도록 빠르게 흘렀고 로버트는 그대로 아침을 맞았다. 이상하게 몸이 아프고 추웠다. 밤새 시달린 생각들에 가슴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서늘했다. 방이 완전히 밝아졌을 때에야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문을 열자 후끈한 여름 공기가 들어왔다. 로버트는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뒤편 정원과 길이 어우러진 완벽한 풍경을 멍하니 감상하고 있었다. 등 뒤로 노크 소리가 들려 답해주었다. 고개를 돌리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제이크가 보였다. “좋은 아침.” 자연스럽게 앞으로 흘러내린 금발이 그의 얼굴을 빛내고 있었다. 말을 끝맺으면 씩 올라가는 입매에 로버트는 늘 시선을 빼앗긴다. 그를 따라 로버트도 희미하게나마 미소지었다. 제이크는 창가에 덩그러니 서 있는 로버트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에게 다가왔다. 창문 쪽을 향했던 몸을 돌렸을 때는 당연하듯 마중 오는 팔이 있었다. 아침마다 자주 하던, 인사와도 같은 포옹이었다. 로버트는 익숙하게 그의 품으로 들어갔다. 몸은 좀 어때. 로버트를 안은 채로 말하는 제이크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이크의 체온이 피부를 데워줬다. 그럼에도 가슴 언저리의 서늘함은 사라지지를 않았다. 그를 안고 있으면 늘 모든 게 괜찮아졌는데. 로버트가 살짝 떨자 제이크는 그를 좀 더 당겨 안았다. 등을 두른 팔과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이 단단했다. 그가 천천히 엄지를 움직여 로버트의 어깨 끝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과 온기로 알 수 있었다. 로버트가 기다리는 한 제이크는 떠나지 않는다. 그는 늦더라도 항상 와주었으니까. 결국 끝에는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지도 몰라. 그리고 네 삶의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되겠지. 혹시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게 더 있어? 너의 가족, 너의 꿈, 그리고 다음은 뭐야? 그가 어떤 것들을 떠나왔는지 묻고 싶었다.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로버트는 기다리고 있다. 언제까지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고, 다시 시작해보면 된다고. 하지만 이 기다림은 제이크를 위한 게 아니라 로버트를 위한 것이다. 제이크에게는 그럴 이유가 있던가. 그는 로버트를 기억하지 못하고 어쩌면 앞으로도 쭉 그럴지 모른다. 그들의 관계는 모호해졌다. 무언가 다시 시작된다 해도 또다시 그의 삶에 들어가는 게 과연 그에게 좋은 일일까. 언제나 고집스럽게 기다리던 건 로버트였고,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제이크는 그저 원래대로 자신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길었던 망설임의 무게를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로버트는 차마 그때를 후회할 수는 없었다. 그를 사랑하고 사랑받던 기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니까. 서로에 대한 감정이 깊어지고 뒤늦게 몰랐던 사실들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를 놓아주지는 못했을 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로버트를 사랑한 시간도 마음도 지금의 제이크에게는 없다. 그들이 헤어지지 말아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조차 이제는 없는 것이다.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끝이 있는 관계라면 결국 그만둘 때가 오지 않겠냐고. 정말로 그런 때가 온다면, 그게 지금이 아닐까.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간 지금. - 초반부 끝나고 중반부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될 듯. 제목이 너무 늦게 나온다.. 연재속도도 전개도 개느려서 정말 답답하지만ㅠ 보고싶은 게 있어서 조금씩이라도 쓰려고 함 행맨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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