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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루 요마 잡는 가이딩물 십칠나더앱에서 작성
ㅇㅇ
24-03-31 08:31
이전 : https://hygall.com/588609069
* ㅅㅈ주의, 주화입마 사파 무순임. 크오 마이너 오브 마이너 컾 취존.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본인도 모름.
스산하게 어둑한 하늘 아래에 을씨년스러운 마을이 아가리를 벌린 채 외지인을 맞이했다. 마을 어귀에는 대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기울어진 나무판대기가 높다란 대들목에 너덜대며 달려있었다. 양쪽 대들목의 바깥쪽으로 돌담이 성인 남자의 가슴팍 정도의 높이로 둘러쳐 있어 아이들이라도 금방 넘어가고 말 것 같았다. 돌담은 마을을 지킬 의지도 힘도 없어 보였다. 마을 안과 밖을 구분하는 수준의 담벼락은 그마저도 군데군데 구멍이 나있어 바람이 숭숭 통했다. 언젠가는 대문이었을지도 모를 나무문 옆에는 헐빈하기 짝이 없는 돌담과는 달리 새 것임이 분명한, 그것도 제법 좋은 나무를 깎아 만든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그도 모자라 공들여 쓰고 새긴 듯한 글씨에 먹을 입히고 나무 진액을 발라 굳혀 반들반들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마을 이름은 '풍림촌'이었다. 그 이름답게 근방에는 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러자 바람에 밀려들어간 대문짝이 끼익 비명을 질러댔다. 저녁 무렵이긴 했으나 청보라빛 정적이 맴도는 마을 광경이 문 사이로 드러났다. 어째서인지 사람은 보이지 않고 비쩍 말라 갈비뼈가 보이는 개 한마리만 배춧잎을 문 채 골목을 쏘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지도에는 석주촌이라고 되어 있는데."
방다병이 지도와 기둥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최근에 풍림촌이라 이름을 바꾼 모양이야."
이연화가 반질대는 기둥을 흘끗 보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선기탑까지 가는 길에 드를 수 있는 유일한 마을인만큼 제대로 쉬고 정비하기를 기대했던지라 마을 입구부터 심상찮은 꼴을 보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야영이 낫겠군."
다른 이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몸을 돌리려는 적비성의 팔을 이연화가 잡아챘다. 하도 빨리 몸을 돌리기에 별 생각없이 잡은 것이었으나, 적비성은 잡힌 팔을 흘끗 보았고 이연화는 태연한 척 하는 기색을 미처 숨기지 못한 채로 손을 놓았으며 방다병은 그런 이연화를 놓치지 않고 쳐다보았다. 마을에 대한 감상으로 분주했던 머릿 속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덮어버리는 바람에 모두 말을 잃었다.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하며 침묵을 깼다.
"너희는 힘이 넘쳐 괜찮은지 몰라도 나는 바람을 막아줄 방이 필요해. 북으로 갈수록 춥다고. 허술하긴 해도 저기 봐, 개도 배춧잎도 들고 다니잖아. 이런 지역에서 채소라니 교역도 하고 먹거리도 있을테지. 선기탑까지는 마땅한 마을도 없어서 야영해야 하는데 정비도 해야하잖아. 여기는 추운 지역이라 화로나 탄을 팔거야. 게다가 말도 쉬어야하고."
이연화는 어떠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방다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연화 옆에 섰다. 적비성은 그러지,라며 앞장 서서 마을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약속이나 한 듯 앞과 곁을 지키는 제 연형제들에 이연화는 알아서 해주니 편하네,하며 슬쩍 외면했던 어색한 기분을 치워 버렸다.
마을 안은 조용했다. 입구에 가까운 집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지 인기척도 없고 창이며 문이 뜯겨져 나가있었다. 소쿠리나 귀퉁이가 깨진 투박한 그릇, 바퀴 한 쪽이 빠진 손수레도 아무렇게나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긴 하나?"
방다병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인상을 썼다. 도무지 사람이 사는 곳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도 배춧잎은 제법 신선해 보였는데.
휘익-
어디선가 도깨비불같은 푸른 빛이 나타나 세 사람 머리 위를 스쳐갔다. 방다병은 본능적으로 검을 들고 방어 태세를 취하며 이연화를 제 뒤로 보냈다. 적비성은 여차하면 쳐낼 기세로 손끝에 자색 빛을 피어올렸다. 도깨비불은 인간에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주변에 요기가 있어야 움직이기 때문에 사람 사는 마을에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직 요기는 느껴지지 않는데. 마을이 요마에게 당했는지도 몰라. 조심해야겠어."
방다병이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비성이 도깨비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불이 희미해도 광범위하게 움직이고 있어. 마을 전체에 요기가 스며있다고 해도 이상할게 없겠군."
이연화는 적비성의 말에 속으로 동의했다.
천마왕을 결계에 가둔 후 어찌된 일인지 죽지 않고 중원 숲 어딘가에서 눈을 떴었다.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프면서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생기가 돌고 감각이 예민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 정도였냐하면, 평소에는 달밤의 정취와 함께 감상할 때나 귀를 기울였던 풀벌레 소리가 그 순간에는 귀를 때리듯 크게 들려 풀벌레가 몇 마리인지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르는 소리며, 나뭇잎이 저들 사이로 바람을 품어 보내며 사르락대는 소리, 어딘가 있는 냇가의 물줄기가 돌에 부딪혀 갈라지며 내는 소리까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와 이연화는 자신이 거대한 귀가 된 것 같았다. 목이 말라 뛰는 제 몸이 고라니처럼 튀는 듯 느껴지고 땅을 딛는 발이 춤추듯 가벼워 인간이 아닌 다른 몸이 되었나 아래를 여러 번 살폈더랬다. 짐승처럼 생경한 감각과 며칠 함께 하며 익숙해질 무렵, 이연화는 자신이 반인반요가 되어 감각이 아주 예민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지금의 이연화는 마을에 낮게 깔린 안개처럼 요기가 퍼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마의 존재가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적비성의 말대로 요기가 마을 전체에 스며 있었다. 보잘 것 없이 작은 곰팡이가 벽 한 면을 채워 방안 가득 곰팡내를 퍼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을에 미약한 요기가 모여 전체를 젖어들게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깨비불이 자유롭게 다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 정도 요기에 이연화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지만, 일행이 제 안전을 핑계로 야영을 고집할지도 몰랐다.
무서운건 요마가 아니라 내 한기라고. 이연화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폭 쉬었다. 겨울 망토를 둘렀지만 벽차지독의 한기때문에 더 춥게 느껴졌다. 발작이 오기라도 하면 야외에서는 더 곤란할 터였다. 마을에 요기가 흐르건 말건 방과 화롯불, 뜨거운 술이 있다면 이연화는 요마와 웃으며 대작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기가 스민 마을이라도 천기당 소당주와 금원맹 맹주를 믿고 가면 안될까? 난 당장 추위가 더 위험하다고."
이연화는 일부러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방다병은 눈살을 찌푸리고 온 얼굴에 '이연화 걱정'을 써붙인 양 침까지 꿀꺽 삼키며 이연화를 살폈다. 제 장옷을 벗어줄 기세라 이연화는 얼른 손사레를 쳤다.
"잊었어? 네가 다치면 나도 다친다고. 너는 어떻게든 건강하고 멀쩡해야지."
"아무래도 어디 들어가야겠어."
이연화에게서 겨우 눈을 뗀 방다병이 적비성을 향해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적비성은 벌써 열 발자국 앞서 마을 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쪽에 불빛이 있다. 사람이 있어."
다행히도 중앙의 거리는 번화가답게 각종 상점이 어우러져 있었다. 마을 외곽의 스산함과 달리 이곳만큼은 보통의 거리처럼 사람들이 나다녔고 국수집, 채소가게, 묵을 수 있을 것 같은 객잔도 보였다. 세 사람은 마음이 놓여 표정이 풀어졌지만 곧 다시 긴장을 해야했다. 낯선 사내들을 발견한 사람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어붙거나 소스라치게 놀라 줄행랑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발빠른 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너무 놀랐는지 얼이 빠진 채 눈만 겁에 질려 있어 보기가 딱할 지경이었다. 방다병이 얼른 양팔을 들어 보이며 나섰다.
"여러분, 저희는 그냥 근처를 지나던 중에 들른 여행객입니다.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방다병이 최대한 선하고 호의적인 미소를 지었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좌판의 상인들도, 물건값을 흥정하던 아낙도, 어린 아이를 옆에 꼭 끼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수레에 부딪힌 여인도, 용감하게도 고기를 썰던 칼을 쥔 푸줏간 주인장도 매한가지였다.
"저희는 요마를 퇴치하는 천사들입니다. 천기당과 금원맹 사람이에요."
방다병은 제 요패를 들어 보이며 신뢰를 얻으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말이 사람들의 경계심을 더 높게 만든 듯 했다. 놀라움과 불안이 섞인 수십의 눈길이 세 사람에게 화살처럼 쏟아졌다. 이연화는 미약하지만 적지 않은 요기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가 궁금했다. 요마가 있다면 이보다는 선명하게 느껴질텐데 이상하리만치 엷고 또 넓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방인을 반기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그저 묵을 곳과 몇 가지 물건이 필요한 평범한 여행자로 방문한 것이니 겁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연화가 정중하게 말하자, 구석에 서있던 남자가 쭈뼛대며 앞으로 나섰다. 옆에는 검은 담요로 둘둘 싼 아이가 비틀대며 따라 걸었다.
"저기... 참말로 요마 잡는 천사시오?"
남자는 몸이 좋지 않은지 얼굴색이 까맣고 뺨이 홀쭉했다. 담요를 두른 아이는 그보다 더 혈색이 안 좋았다. 남자가 나서자 주변에서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걱정이라기 보다 성을 내는 것 같았다.
"뭐하는거요? 저들이 뭐하는 사람인지 알고!"
"괜히 우리까지 위험에 빠트리려고!"
"촌장님이 아시면 크게 노하실거요!"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뱉어내는 말에 세 사람은 눈썹을 찡그렸다. 왜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다병은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본 후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천사이고, 이쪽은 의원입니다."
의원이라는 말에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남자는 당장이라도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이연화의 앞에 무릎을 꿇어 앉았다. 당황한 이연화가 허리를 숙여 일어나기를 청했으나 남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의원님! 제발 즤 딸을 살려주십시오. 마을 의원은 모른다는 말만 하고 딸아이는 이 모양 이 꼴입니다요."
"그만 일어나시지요. 제가 잠시 진맥을 하겠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연화는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겁이 나는 듯 제 아버지의 등 뒤로 숨어들었지만 남자가 달래자 조심스레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붉게 달아올라 검은 핏줄이 옅게 진 가느다란 팔목이 보였다. 이를 본 이연화가 굳은 표정으로 아이의 팔목에 손을 대었다.
'이 어린 아이가 벽차지독이라니?'
옅긴 했으나 저와 같은 벽차지독이었다. 이연화는 반사적으로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열병을 앓는 것마냥 얼굴이 붉었다.
"아이가 독에 당한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독이란 말에 방다병과 적비성의 표정까지 찌푸러졌다. 조용히 지켜보던 사람들 중 일부는 경악과 걱정이 서린 표정이었으나 어떤 이들은 화가 난 듯 보였다.
"그게...의원님! 천사님들! 부디 제 딸을 구해주십시오!"
남자가 갑자기 발밑에 엎드려 절을 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요마에게 당하고 있어요! 그들이 제 딸마저 끌고 가.."
남자가 말을 잇지 못하고 억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아이가 새된 소리로 아버지!라 울며 주저 앉아 남자를 흔들었고 이연화가 재빨리 숨을 확인했다. 남자는 옆에 떨어진 작은 돌을 맞고 기절해버렸다. 방다병이 이아검을 뽑아 아이와 이연화 앞을 막아섰고 적비성은 심상찮은 표정을 하고 선 시장의 몇몇 사람들을 주시했다. 미묘하게 느껴진 요기는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적비성의 몸도 엷지만 찌릿한 기운을 감지해냈다.
"약한 요마던가, 요력을 주입 당한게 분명해."
적비성의 말에 한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적비성은 쳐다보지도 않고 접근을 허하지 않겠다는 듯 비풍백양으로 가벼이 그를 날려버렸다. 아이의 아버지에게 요력을 실어 돌을 날린 자였다. 이를 본 사람들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대협! 저희를 도와주세요!"
"대협! 저희 마을을 구해주세요!"
갑자기 반절 가량 되는 사람들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차마 가까이 오지는 못한 그들의 얼굴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반면 제자리에서 굳은 표정을 한 이들은 공포와 불안이 섞인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연화가 간청하는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요마가 마을 사람들에게 독을 써서 요력을 집어넣고 있는게 맞습니까?"
명확하게 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며 답을 하지 못했다. 이연화는 그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혹은 본인둘도 실상을 몰라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촌장님!"
누군가의 외침에 돌아보니, 마을의 촌장이 한 장정과 함께 지팡이를 짚으며 서있었다. 노쇠한 백발의 촌장은 왜소한 체격에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옷이 단정했지만 고급스럽지는 않았다. 반면 같이 온 장정은 이 마을 사람들과 느낌이 사뭇 달랐다. 얼굴에 살이 오르고 체격이 건장해 이 마을 사람같지가 않았다.
"천사님들이 저희 마을에 오시다니 하늘이 돕나봅니다. 누추하지만 저희 집에 모시겠습니다."
방다병과 적비성은 갑작스레 나타나 초대를 해오는 노인을 흘끔 보고 이연화에 곁에 붙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연화?"
"객잔이 더 안전할 수도 있어."
두 사람의 말에 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은 아직 독에 당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요력을 받아 반인반요가 된 이들은 적대적인 태도였다. 객잔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는 반인반요가 더 많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촌장이라고 예외이리란 법은 없었다.
"어설프게 요기를 품은 사람들이 저희를 적대시하니 촌장님도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이연화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말했다. 사실 이연화는 촌장의 몸에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요력이 흐르고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방다병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 신중을 기했다. 적비성이 이연화를 흘끔 쳐다보고는 눈짓을 했다. 너도 느낄 수 있을텐데, 애송이때문에 그러나. 적비성은 이연화의 선택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말들이 많군."
적비성이 촌장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촌장을 지키는 역할인 듯한 사내가 험악한 표정으로 앞을 막아섰지만 적비성은 개의치 않고 내력을 실어 그를 밀쳐냈다. 사내가 잠시 밀려난 틈에 적비성은 촌장의 팔을 움켜 쥐었다. 촌장은 놀란 듯 했지만 침착하려 애썼다.
"반인반요인 네 말을 어떻게 믿으란거냐."
적비성의 말에 촌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다 알려드리지요. 천사님들도 의원님도 예삿분들이 아니신 것 같은제 제가 어찌 숨기겠습니까. 생각하신대로 저희 마을은 반인반요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게 다 풍림이 나타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래서 석주촌이 풍림촌이 된거로군요."
방다병의 말에 촌장이 반가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촌장은 더 열심히 설명했다.
"본래 석주촌은 작은 마을이긴 해도 활기차고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서풍이 불어대더니 마을 서쪽에 숲이 나타났어요. 그러더니 요마가 나타나 다짜고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바치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했지요. 저는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날 잡아가라 했지만 요마가 비웃더군요. 요마는 몸이 실한 젊은이들부터 내놓으라 했어요. 저는 덤처럼 끌려갔지요. 요마는 벽차지독을 써서 사람들을 중독시키고 살려면 요력을 받아들이라 했습니다. 저희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천사님들."
촌장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묻어났다. 그의 간곡한 설명을 들은 세 사람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적대적이었던 마을 사람들도 순한 양처럼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아이까지도 건드린단 말입니까? 게다가 이 아이는 독에 당하기만 했어요."
촌장이 비통한 한숨을 지었다.
"처음엔 어른만 내놓으라 했지요. 그러다 사람이 모자라지자 못된 요마가 애어른을 가리지 않았어요. 당연히 안 보내려 했지만 한 번 거부했다가 본보기로 아이를 포함해 마을 사람 넷을 죽여버리니 더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누가 갈지 정할 수도 없어 아이들까지 포함해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독을 먹고 기다리다가 풍림이 나타나면 그리로 데려갔지요..."
방다병이 인상을 썼다.
"아무리 그래도 죄없고 약한 아이에게 독을 써서 데리고 가다니 당신들이 그러고도 어른입니까?"
"그 또한 사정이 있습니다, 천사 대협. 날이 춥고 밤이 되었으니 가서 나머지 이야기를 들으시지요."
촌장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간청했다. 이연화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이 아이와 아버지에게도 방을 내어주시죠. 아이가 독으로 발작하지 않게 잠시라도 눌러야겠어요. 독이 약하다 해도 아이가 감당할게 아닙니다. 그 조건이면 촌장 댁으로 가지요."
"물론입니다."
장정이 아이와 쓰러진 아버지를 한 팔에 끼고 어깨에 둘러 메었다. 사내는 이미 요력이 3할은 되어 보였다. 힘이 장사인 것도 요력 덕인 듯 했다. 이연화는 잠시 사내에 집중하여 그의 요기를 가늠해 보았다. 요력을 주입할 수 있는 상급 요마의 짓이겠으나 그 요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연화가 여지껏 만난 요마 중에 자신을 압도한 개체는 없다시피 했다. 인간이었을 때 만난 요마 중에는 여럿 있었지만 반인반요가 된 후로는 대부분이 만만했다. 이번 요마도 마찬가지였다. 이연화는 제 요력의 주인이 천마왕이라 저가 만나는 요마들이 하찮게 느껴진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요력을 갈무리하는 일도 천마왕의 요력을 가졌기에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만일 요력을 숨기지 못했다면 적비성이 진작에 강한 요력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연화로서도 천마왕을 의심했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결계에 갇힌 천마왕이 저한테 요력을 넣을 이유가 뭐가 있딘 말인가. 그 자리에서 찢어 발겨 분풀이를 하지 않은 쪽이 신기했다. 이연화는 잠시 든 잡상을 지워냈다.
앞장 선 촌장을 따라 세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레 이연화를 가운데에 두고 방다병과 적비성이 양 옆을 감쌌다.
"촌장이 수상해."
방다병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가야지. 저건 토끼지만 말이야."
"요마를 잡을 생각이냐."
"그게 너희들 일 아니었어?"
이연화가 답답하다는 듯 묻자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픽픽 쓰러지지나 마라."
"어차피 방다병이 다치면 난 쓰러질 수 밖에 없다고."
방다병이 거북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조심할게."
"조심하는건 좋은데 몸을 너무 사리면 할 일도 못하는 법이니 그냥 하던대로 해. 이 팔자를 어쩌겠어."
이연화는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말하려 했지만 천기당 소당주의 얼굴은 어두워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게 싫으면 이연화는 나한테 넘겨."
적비성이 툭 내뱉자 방다병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무어라 항변하지 않았다. 적비성과 경맥을 통하면 이연화가 고통받지 않을지도 몰랐다.
"적맹주. 내가 아무 능력이 없어 대신 다치는지도 몰라. 너와 경맥을 통한들 나한테 뭐 뾰족한 능력이라도 생기겠어?"
방다병이 의기소침해지는 것이 마음 쓰여 한 말이었으나 예상한대로 적비성은 개의치 않았다.
"안 다치면 되지. 너 하나 지키는건 얼마든지 해."
혈기왕성하지만 아직 경험이 적은 열아홉 방소보와 달리 어려서부터 제 몸을 지키는데에 이력이 난 적비성은 자신만만했다.
"나도 목숨 걸고 이연화를 지킬거야!"
"네가 목숨을 걸면 이연화도 목숨이 위태해지겠지. 의욕만 앞선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애송이. 간단해. 빠르게 적을 죽이고 내가 산다, 그 뿐이다."
어째 자기를 두고 실갱이를 하는 듯한 두 사람의 신경전에 이연화는 골치가 아파왔다. 말싸움에서 방다병은 적비성을 당하지 못했다.
"그만들 해. 지금 이럴 때야? 자꾸 싸우면 내력이고 밥이고 안 주는 수가 있어."
너도 필요하잖아, 같은 말로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두 사람은 얌전히 이연화의 말을 따라 입을 꾹 닫았다. 밥은 안 줘도 된다는 말을 두 사람의 머리 속에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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