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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주운 배꾸가 알고보니 수인이라는 걸 깨달은 버논 ㅇㄴㄷ앱에서 작성
ㅇㅇ
23-11-22 00:33
버논은 버드를 가족으로 맞이하고 나서 이이상 자기가 변화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던 때가 있었어. 작은 동물의 생명을 책임지기로 하고 밥을 챙겨주고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에 따끈한 뭔가를 품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거든. 살며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은 많지 않았어. 누군가가 영구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된 기분 말이야. 저에게 몸과 마음을 온전히 다 맡기는 존재를 세명이나 키워봤지만 언젠가 자라고 나면 버논은 손을 떠날 게 분명했고, 예상대로 떠난 뒤에도 그게 서운하다고 느끼진 않았어.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형제들과 버드는 달랐어. 버드는 앞으로 온전히 버논 뿐이었고, 버논은 앞으로 버드의 모든 걸 책임져야 했어. 그게 답답하기는 커녕 좋았어. 오히려 그애가 무색무취한 자기 세상에 찾아온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거기서 더 변화할 수가 있다는 게 신기한 요즘이야. 평생 소통을 할 수 없을 거라 믿던, 아기같은 존재가 사람으로 변할 수 있고 마음을 직접적으로 나눌 수가 있다는 걸 깨닫고 난 뒤부터였지.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이제 버논은 버드가 수인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픈 것도 슬픈 것도 버드가 말하면 알 수 있게 됐으니까.
버드가 있는 곳에서도 없는 곳에서도 버논은 늘 버드를 생각했어. 집에 돌아와 버드를 만지고 차가운 손으로 처음 만지고 싶지 않아서 생전 안 들고 다니던 손난로도 잔뜩 주문해서 차에 넣어두고, 길을 가다 펫샵만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간식이나 옷 같은 걸 열심히 쇼핑하고 있었지. 버논은 그럴 때 낯설면서도 간지러운 기분을 느꼈어. 동생들을 자기 손으로 키워서 다 내보내서, 빈둥지 증후군 같은 걸 느낀건가? 누군가를 기르고 부양하는 게 자기 체질인가 싶은 생각도 잠깐 했지만 그렇다고 단정짓기에는 다른 뭉클함이 있었어. 버드가 있다는 건, 뭔가 반짝거리는 느낌이야. 잠깐만 바깥에 있으면 궁금하고, 돌아가서 끌어안고 싶어지고, 아무도 모르는 데서 둘만 남게 된다고 해도 충분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아침에 눈을 뜨면 버드가 몸에 푹 안겨서 꼬물거리고 있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기는 해. 버논이 조금 움직이면 어떻게 아는 지 부스스 일어나서 아침이냐고 물어 왔거든 그러고는 버논의 뺨에 입술을 꼭 포갰어. 버드의 키스는 포개다, 라는 말이 딱 맞을 정도일 거 같다. 쪽, 하는 소리도 내지 않고 살짝 뭉개고 떨어지는데 버논은 버드가 그럴 때마다 어딘가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서 작게 웃었어.
버드는 버논이 왜 웃는 지 몰라서 눈도 덜뜬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어. 왜요? 하고 묻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을 들은 거 같았지. 아무것도 아니야,하고 말해주면 더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 그게 너무 귀여워서, 안그래도 자고 일어나 까치집이 된 곱슬 머리를 한번 더 헤집어주고 같이 양치를 하러 갔지.
버논, 그거 뭐예요? 책에 뭐라고 써 있어요?
버논이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을 때였어. 버드는 버논이 읽는 책을 항상 궁금해하곤 해. 버논의 무릎 위에 턱을 올려 놓고 말이야. 버논은 버드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주려고 하는데, 그게 잘 전달이 되는 지는 알 수가 없었어. 버드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데 솔직히 알아듣는 거 같진 않았거든.
그래서 이번엔 읽고 있던 페이지를 직접 보여줬어. 대충 이런 내용이야. 하며 버논이 무덤덤히 건넨 책을 받아든 버드의 표정이 곧 묘하고 애매해졌어. 버드는 미간을 좁히고 지그시 페이지를 노려보다가 결국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내려놨지.
이, 이거 어떻게 읽는 지 모르겠어요. 글자가 너무 많아서..
고개 숙인 버드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있었어. 버논은 버드가 억세게 감춰 문 아랫입술을 바라보며 턱을 살짝 잡아당겼어. 그사이 잇 자국이 날만큼 물었던 모양이야. 버논은 창피한지 자리를 떠나려는 버드의 손을 잡아끌었어. 그러고는 제 무릎 위에 버드를 앉히고 덮어두었던 책을 펼쳐보였어. 그리고는 버드의 손등과 손가락을 감싸듯이 잡았고, 버드의 손끝으로 어딘가를 짚게 했지. 보고 있진 않았지만 버드의 시선이 또르륵 따라오는 게 느껴졌어.
이게 B야. 네 이름의 버드의 B. 그리고 그 다음은…
버드는 자기 손으로 버논이 가리킨 것들을 꼭꼭 곱씹었어. B…u..d… 계속 순서대로 가리켜보면서 말이야. 버논은 꽂아두었던 펜을 빼서 손등에 버드의 이름을 적어줬어. 버드는 버논이 적어준 손등을 눈에 가까이 대고 신기하게 바라봤어. 버드가 적어달라던 자기 이름까지 써주고나서야, 종이에 써줄 걸 괜히 손등에 써줬나 싶은 버논이야.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버드는 엄청나게 좋아하는 눈치였어.
가르쳐줄까?
네?
버드가 놀라서 버논을 돌아봤어. 버논은 글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지. 어린 동생들 셋이 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글을 깨치게 한 것도 자기니까 못할 것도 없었어. 공부하면 저것들을 너도 전부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서재를 가리키자 버드가 와아, 하며 탄성을 터뜨렸어.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네가 원한다면 못할 건 아무 것도 없어.
버논은 망설임없이 말했어. 정말 아무것도 없노라고 말이야. 잠깐 동안 해서는 안 될 불법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했지만… 버드가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하고 두번 생각하지 않았어. 버논은 빈 노트를 가지러 가느라 발그레하게 물든 버드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
버논, 저도 저거 먹고 싶어요.
버드의 말에 버논은 티브이 화면을 바라봤어.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가게 브랜드의 광고였어. 마침 아이들이 우와아 하며 맛있게 먹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고 말이야. 그래, 사다줄게. 무슨…맛, 하고 버논은 말을 흐렸어. 저는 달콤한 거로요. 대답하는 버드의 대답에 선뜻 한 가지를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냥 전부 사오면 되려나…
저거는 왜 31번이에요?
화면의 숫자를 가리킨 버드는 침을 꼴깍 꼴깍 삼켰어. 글자 대신에 숫자를 먼저 인식하는 거 같았어. 그게… 버논은 서른 한 가지 맛이라는 걸 설명한 뒤에 버드의 머리에 뿅 나타난 가상의 수제비 귀를 보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직접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어.
버드가 강아지가 아닌 사람 몸으로 바깥에 나가는 건 처음이었어. 버논은 자기 옷장을 다 뒤져서 최대한 작은 옷들을 찾아모았지. 제일 작은 옷이라봐야 버논의 옷이라 버드에게는 품이 너무 커서 안에 후드 티 안에 받쳐입은 흰 반팔티가 엉덩이를 덮을 정도였어. 창고를 뒤져보니 중학생 때 브랫이 신지도 않고 보관해둔 운동화가 아직 있어서 그걸 신기고 예전에 테리가 생일 선물이라고 사준 기다란 롱패딩을 입히고 나니…
안돼, 추울 거 같아.
성에 차지 않아서 방한용품을 잔뜩 꿰어 입히고 나니 버드가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걸었어. 벙어리 장갑을 낀 손으로 버논의 손을 꼭 잡은 버드가 몇걸음 나가지 않아 꽁하게 미간을 찌푸렸어.
더워요..
불편해보이는 표정으로 낑낑대며 올려다보는 버드를 보다가 버논은 저도 모르게 귀여워서 덥썩 안아버렸어. 꼭 방한용품으로 둘둘 싸맨 러시아 아기 같았거든.
버논은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린 버드의 턱을 물티슈로 닦아주면서 몰에 나온 김에 버드의 옷을 좀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버드가 언제까지나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려면 마트에서 임시로 사온 옷들로만 버티기에 무리가 있었어. 속옷이며 양말이며 전부 사둬야겠단 생각으로 팜플렛을 읽어내리고 있었는데, 버드가 어느 한쪽을 빠안히 응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 입을 헤에 벌리고 있어서 물고 있던 플라스틱 스푼도 떨어뜨리고 말이야. 언젠가 버논이 환기하려고 열어둔 창문으로 참새가 날아들어왔을 때 같은 눈이었어.
버논은 플라스틱 스푼을 타이밍 좋게 받아내고, 버드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어. 그리고 버드가 넋이 빠져있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 같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한 커플이 몇 계단 위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그것도 꽤 진득하게 말이야. 버논은 버드의 말갛고 순한 눈이 담기에는 너무 외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버드보다 한 계단 위로 올라가서 시야를 차단했어.
그러자 갑자기 시야가 가려져서 궁금했는 지 버드가 옷깃을 당겨서 버논의 귀에 속삭였어.
버논…저 사람들은 지금 뭐하는 거예요?
버논은 잠깐 다른 말로 둘러댈까 잠깐 고민하다가 사실대로 대답했어.
키스하는 거야.
저렇게 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누구랑 하느냐에 따라 달라.
혀가… 혀 끼리 닿는데도요…?
입이 다 축축해져서 기분이 나빠지지 않을까요? 버논은 그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작은 강아지일 때랑은 다르게 초록빛인 버드의 눈동자 색이 오묘하다고 생각했어. 좀 더 빤히 바라보는 쪽이 버논이 되자, 버드가 당황해하며 시선을 어색하게 흘렸어. 버논은 그 눈동자가 자길 향하지 않자 아쉬워졌어. 버드가 발끝을 깐닥거리면서 애써 딴청을 부리는 게 귀여웠지만 말이야.
궁금해?
뿅 소리가 날만큼 빠르게 올라오는 고개를 보고 버논은 웃음이 났어.
그 아이스크림 다 먹으면.
잠시 후 에스컬레이터가 층에 다다르자, 버논은 버드의 허리를 감쌌어. 그리곤 움직이는 계단이 쉴새없이 맞물리는 걸 무서워하는 버드가 당황하다 다치지 않게 무사히 바닥에 내려주었지. 버논은 버드의 표정을 살폈지만, 버드는 목까지 새빨개져서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 컵을 빤히 바라봤어. 아이스크림은 거의 녹아서 물이 되어 있었어.
‘새빨간 게 꼭 토마토같네.’
버논은 생각했어.
슼탘
버논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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