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hygall.com/588727406
너붕은 선뜻 알겠다고 말하지 못했음. 탈출하다가 실패하면? 아니 사실 그것보다도, 탈출하고 나면?
티모시가 날 가만히 내버려둘까?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는 건 아닐까? 여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인데 그럼 어떡하지??
설령 도망자 신세가 되지 않는대도, 이곳에서 어떻게 벌어먹고 살아..
...차라리 티모시 명령에 별궁에 유폐된채 사는게 낫지 않을까?
길어지는 너붕의 침묵에 브래들리가 정적을 깼음.
"싫으면 말던가."
어깨를 으쓱이는 브래들리의 모습엔, 미련이라곤 전혀 없어보였겠지. 그래서 너붕도 황당했음. 이 인간이 방금까지 꺼내주겠다고 하던 인간이 맞아? 시종으로 위장해서 별궁까지 잠입해놓고 너무 순순히 물러나는 거 아냐??
"더 설득 안 해?"
너붕이 얼굴을 구기고 묻자, 브래들리는 조금 진지한듯 가볍게 미소 지었음.
"모든 결정은 네게 달려있어, 허니."
"......."
"늘 그렇듯이."
그 대답을 들은 너붕은 잠시 주위를 둘러봤겠지. 가구, 소품, 하물며 커튼의 줄 하나까지, 로코코풍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방 안. 바깥 복도에는 있는듯 없는듯 조용히 명령을 기다리는 사용인들이 있을테고.
조금 차분해진 표정의 너붕이 브래들리를 향해 말했음.
"날 여기서 꺼내줘."
너붕의 말에 브래들리가 진지함은 금세 휘발된 얼굴로 박수를 짝 쳤음.
"좋아.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별궁에서라면 안전하고 편할 순 있음. 하지만 그게 얼마나 지속될까. 너붕은 게임에서 관계도가 마이너스를 찍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음. 관계가 숙적으로 설정되어서 상대가 플레이어를 제거하려고 함.
게임을 끄기 직전에 너붕과 티모시의 관계도는 마이너스를 찍었고, 티모시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황제고, 황제가 너붕을 죽이려고 하면... 더 볼 필요도 없이 끔살엔딩임 ㅇㅇ
개똥 밭에 굴러도 저승보단 낫다고, 돌아갈 방법이라도 못 찾고 죽는 건 억울했음. 다만 지금에서 걱정은,
"근데 날 어떻게 꺼내줄건데?"
이 의심스러운 상단주가 너붕을 어떻게 탈출시켜주냐는 거임.
"헤이, 허니. 서운하게 왜 이래? 나를 한 두번 봐?"
너붕이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긴 했음.. 그렇지만 잠자코 입 다물고 있었겠지. 브래들리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막힘 없이 설명했음.
"밖에 내 부하들이 시종인척 잠복해 있어. 내가 신호를 주면 바로 나갈 수 있게 준비할 거야. 별궁 밖으로 나가면 비밀통로를 통해서 밖으로 나갈 거고. 통로 입구 근처에 마차도 미리 준비시켜놨고, 마차 안에 갈아입을 옷도 준비했으니 따로 챙길 필욘 없어."
직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계획적이고 꼼꼼해서 내심 놀랐겠지. 근데 너붕이 가만히 들으면서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는 거임.
"거절했으면 어쩌려고?"
"내일 또 왔겠지. 네가 '결정'할 때까지."
결정은 내가 한다 어쩌고 하더니, 결국 답정너였음. 이렇게까지 날 꺼내려는 이유가 뭘까. 더 의심스러워졌지만, 어쨌든 당장 구명줄은 브래들리 밖에 없었음.
너붕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음.
"일단, 지금은 안돼."
"왜? 다 준비되어있는데."
이맛살을 찌푸리며 항의하는 브래들리에게 너붕이 덧붙임.
"준비할게 더 있어."
"좋아, 말해봐."
"나랑 비슷한 체구의 시체를 준비해줘. 태워서 나인 척 위장할거야."
도망간 것처럼 보이면 추격을 해올 수도 있으니, 아예 싹을 잘라버릴 생각이었음.
"날 죽이고 싶어하는 누군가의 짓처럼 꾸미는게 좋겠어. 시간은 모레 새벽으로 하고... 시체를 두고 불을 붙인 다음,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면 시종으로 위장한 네 부하가 소리를 질러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걸로 하자. 괜히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는 건 그러니까."
"...."
"아, 시체에 칼자국도 몇 개 남겨놔야겠다. 원한 살인인 것처럼 보여야 하니까, 시체 근처에 흉기도 두고."
시체 옷도 자신의 옷으로 미리 입혀놔야겠다고 중얼거리는 너붕에 브래들리가 헛웃음을 흘렸음. 도망갈까 말까 망설이던 사람이 맞나 싶었겠지. 단지 너붕은 장르 고인물이라 도망 클리셰를 꿰고 있을 뿐이지만...
*
도망을 계획한 그날 밤. 너붕은 별궁 뒤뜰을 걸으며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음. 마음 속으론 패물들을 양말에 수십번 쑤셔넣었지만, 원한살인으로 보이게 하려면 절대 하면 안되는 짓이 도둑질이었음.
...그 서부 상단주란 놈 날 원양어선에 태우는 건 아니겠지.
새삼스러운 걱정을 하는데, 갑자기 드리운 그림자에 너붕이 헛숨을 들이킴.
"티모시?"
"...허니."
티모시는 시종 하나 없이 나타났음. 앳되어 보여도 황제는 황제인건지.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낀 너붕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몇걸음 물러났음. 멀어지는 너붕의 발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티모시가, 고개를 들어 너붕을 바라봤음.
"서운합니까?"
"...아니."
구라였음. 너붕은 서운할 수 밖에 없었음. 당연함. 너붕이 티모시 살리겠다고 밤 새가며 리로드한게 며칠인지 셀 수 없음.
"너는 나를 못 믿는 거잖아."
그렇지만 티모시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님. 꼭 나쁜 사람이 아니어도 방해가 된다 판단이 들면 티모시에게서 떨어트려 놨거든.
아버지처럼 따르던 가정교사도, 형제같은 사이던 백작가 영식도, 심지어 친모인 왕의 정부까지도. 이간질을 하고 죄를 뒤집어 씌우기도 했음.
과정이 어떻든 결말에선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이니까 너붕이 처리한 거지만. 티모시는 너붕의 행동을 당최 이해할 수 없겠지.
"네, 믿지 못해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단칼에 대답하는 거 아니니...? ㅋㅋ... 우리 어릴 때는 사이 좋았잖아..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티모시가 바짝 다가오자,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음. 채 피하지 못한 너붕이 고개를 들자, 괴로움에 일그러진 티모시의 얼굴과 마주했음.
"대체 나에게 왜 그랬어요?"
너붕은 가만히 티모시를 올려볼 수 밖에 없었음.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었겠지.
네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고. 더 이상 네가 어린 나이에 죽는 걸 보기 싫었다고. 황제로 만들어서, 네 목숨을 수십번 뺏어간 자식들에게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고.
아니면 그냥 미안하다고?
솔직히 내겐 게임일 뿐이었고, 너를 이렇게 현실로 만날 줄은 몰랐다고.
그래, 너붕이라고 게임 속 캐릭터가 이렇게 너붕에게 따질 날이 올 줄 알았겠어?
"당신은 잔인해요."
그것도 너붕을 완전히 미워하지도 못하는, 마음이 여리다 못해 아직 어린 캐릭터가 말이야. 씨근덕 거리는 숨소리는 마치 우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음. 눈은 바짝 말라 있었지만.
어쩌면 티모시는 너붕을 죽이지 않을 것 같기도 했음. 그리고 동시에 죽이고 싶은 이유가 많아 보였음.
결국 너붕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닫아버림. 그게 티모시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거라는 걸 알면서도.
*
늦은 새벽, 황제의 집무실 밖이 소란스러웠음.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그 자질을 의심 받는 어린 황제는,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채 오래된 고서를 읽던 중이었음. 한 시종이 노크와 함께 다급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음.
"폐하!"
별궁에 불이 났다는 소식과 함께.
"황후는?"
"별궁의 모든 이들이 불길 속에서 황후 폐하를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시종은 어떻게 말을 이어야할지 난감했음. 황제에게 까맣게 타버린 황후의 상태를 보고할 순 없으니까.
그러나 상황을 파악한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럴 리가."
시종이 놀라 고개를 들만큼 단호했음.
"사람을 풀어 황후를 찾아내라."
이미 시신으로 발견된 황후를 찾아내라는 명령은 당황스러웠으나, 흉흉한 황제의 눈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음.
"그래, 황궁 기사단에게 수색을 시작하라 해야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제가 집무실 밖으로 걸어나가니, 조용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어둠이 걷히지 않은 복도를 빠르게 걸으면서, 황제는 몇가지 추측을 내뱉었음.
"불이 나기 전 황후는 핑계를 대며 주변을 물리고 혼자 있었겠지."
"......."
"시체는 불에 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으며, 처음으로 불길을 발견한 이는 찾을 수가 없을테고."
"......."
"내 말이 틀렸나?"
황제가 무감하게 읊조린 내용들은 마치 현장에 직접 있었던 사람처럼 정확했음.
시체는 누군지 식별할 수 없을 정도였고, 가슴에 자상이 여러개 발견됐음. 불이 났다며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린 시종 역시 목격담만 있을뿐 누군지는 알아낼 수 없었음.
굳이 시종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답을 안다는 듯, 황제가 중얼거림.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틀림 없이 도망을 친 거겠지."
차분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였음. 황후를 향한 신뢰라곤 전혀 느껴지진 않는.
바로 옆에서 그 모든 말을 듣고 있던 시종은, 송구스러워진 나머지 고개를 푹 숙였음. 아니, 애써 못본 척할 수 밖에 없었음.
"그래. 죽었을 리가 없어...."
매정히 말하는 황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고, 꽉 쥔 주먹은 형편 없이 떨리고 있기에...
뇌절 ㅁㅇ..
티모시너붕붕
뿌꾸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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